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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야생화, 맛/경주 돌아보기 Gyeong Ju 1 (完)

선화공주 아빠는?

by 깜쌤 2006. 1. 19.

글 제목이 좀 그렇다. 요즘 아이들이 많이 본다는 연속극 ""에서는 공주가 아버지를 어떻게 부르는지 모르겠다. 낙랑공주, 선화공주, 평강공주는 모두 사랑과 관계있는 분들이다. 선화공주의 아버지가 바로 신라 26대 진평왕이다.

 

오늘은 진평왕릉을 한번 가보기로 했다. 나야 뭐 변함없이 내가 사랑하고 아끼고 귀여워하며 애지중지하는 나의 자가용, 두 바퀴 자가용을 타고 간다. 바퀴가 두개 달렸으니 오토바이를 생각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어디까지나 자전거를 의미한다.

 

이 자전거 도로로는 경주 시내에서 보문 관광단지로 올라가는 길이다. 아시다시피 양쪽은 모두 벚꽃나무로 채워져 있어서 4월 10일을 전후하여 경치는 환상적으로 변해버린다. 혹시 벚꽃 구경을 하러 오시는 분이 있다면 그때쯤 오시기 바란다.

 

  

 

보문으로 올라가며 왼쪽으로 보이는 기와집 동네가 "숲머리"라는 곳이다. 이 동네는 이제 거의 다 음식점들로 변신하고 말았다. 이 동네 조금 못 미쳐서 오른쪽으로 난 길로 들어서면 진평왕릉 가는 길이 된다.

 

 

뒤로 보이는 곳이 경주 시내이다. 북천을 따라 양쪽 모두 보문으로 통하는 도로가 나 있다.

 

 

숲머리 동네를 배경으로 한 저 멀리 산자락 밑이 바로 보문 관광단지이다. 숲머리 마을에서 보문은 가깝다.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벌판 한가운데 진평왕릉이 자리 잡고 있다. 무덤을 둘러 싼 고목들이 운치를 더해준다.

 

 

건너편에 보이는 산이 낭산이다. 예전에는 여우가 많이 살았던 곳일까? 선덕여왕의 능이 낭산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그러니 결국은 부녀가 부근에 함께 영면하는 셈이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작은 산이 낭산이고 멀리 보이는 산은 남산이다.

 

 

"마한 백제 문화 유산 홈페이지(http://www.godoiksan.go.kr)"에서 가져온 자료를 소개해 본다. 아래 글은 원문을 그대로 가져 온 것이다. 보기에 편하도록 단락은 내가 임의로 조금 나누어 보았다.

 

백제(百濟) 제30대 무왕(武王)의 이름은 장(璋)이다. 그의 어머니는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 못 가에 집을 짓고 살고 있었는데 그 못의 용(龍)과 관계하여 장을 낳았다. 아이 때 이름은 서동(薯童:마동)이다. 재주와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늘 마를 캐어 팔아서 생업을 삼았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마동이라 이름했다.

 

그는 신라(新羅) 진평왕(眞平王)의 셋째공주 선화(善花)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머리를 깎고 신라의 서울인 서라벌(徐羅伐 지금의 慶州)로 가서 마를 동리 아이들에게 먹이니 아이들과 친해져 그를 따르게 되었다. 이에 그는 동요(童謠)를 지어 여러 아이를 꾀어 그것을 부르게 했는데 그 노래는 이렇다.

< 선화 공주님은 남 몰래 얼러두고 맛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가다. >

 

 이런 동요가 서라벌 안에 쫙 퍼져서 대궐에까지 들려지니 백관(百官)들이 임금에게 극력 간하여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 보내게 했다. 떠나려 하자 왕후(王后)는 순금 한 말을 노자로 주었다. 공주가 장차 귀양 터에 이르려 하는데 서동이 도중에서 나와 절하면서 모시고 가겠다고 했다. 공주는 비록 그가 어디서 온 지는 알지 못했으나 우연히 믿고 좋아했다.(이하 생략~~~)

 

 

나도 딸을 출가시킬 입장이 되어보니 진평왕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 할 것 같다.

 

 

딸을 낯도 익숙하지 않은 총각에게 내어 주는 그 분의 심정은 이런 경치처럼 스산했을지도 모른다.

 

 

자전거를 타고 들어 온 길이다.

 

 

무덤 둘레엔 그 흔한 조각품들이나 석물 하나 없다.

 

 

어떤 분이 자동차를 가지고 여기까지 찾아오셨길래 도움이라도 드릴까 싶어 여쭤 보면서 자동차 안을 보았더니 속에 중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함께 타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내려서 걷기를 싫어하는 모양인지 그냥 차를 돌려 나가고 만다.

 

허허롭다. 한 오십미터를 남겨놓고 그냥 돌아서다니..... 우리 자녀 교육의 현주소를 보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려온다.

 

 

진평왕릉 쪽에서 마을을 보면 새로 생긴 절간이 보인다.

 

 

이렇게 찍어 놓으니 시내 한가운데 자리잡은 봉황대 옆모습 같다.

 

 

추수를 해버린 벌판은 황량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경주 시내가 저 밑으로 보인다.

 

 

다시 자전거를 타고 나가면서 마을에 들러보았다. 마을 한가운데 설총 선생의 묘가 있기 때문이다.

 

 

이두를 만드셨다는 설총은 여기서 영원한 잠을 주무신다. 소년 한국일보 홈페이지(http://kids.hankooki.com)에서 가져온 설총에 관한 자료를잠시 소개해본다.

 

 

설총은 신라 시대의 큰 스님 원효(元曉ㆍ617~686년)의 아들이다. 삼국유사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하루는 원효 스님이 미친 척 거리를 다니면서 '그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나에게 주겠는가?/ 내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어 내리라.'고 노래했다.

 

모두들 그 뜻을 알지 못했지만, 태종만은 '이 스님이 귀부인을 얻어서 현명한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 나라에 현인이 있으면 그 이로움이 클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이 때 요석궁에 홀로된 공주가 있었다.

 

태종은 관리를 시켜 원효를 찾아 들이도록 했다. 관리는 원효를 만나자 함께 물 속에 넘어져 옷이 다 젖게 한 다음, 그를 궁 안으로 데려가 옷을 말리게 했다. 그래서 유숙하게 되었는데, 공주가 아이를 배어 설총을 낳았다.

 

이 전기를 통해 설총이 태어난 시기가 태종 무열 왕 때인 650년대 후반임을 알 수 있다. 설총의 성장 기록은 거의 없다. 삼국사기에는 '성품이 총명하고 예민해서 태어나면서부터 도리와 학술을 알았다.'고 했다. 그 다음은 그가 훨씬 자라 어른이 된 때의 기록이 나온다.

 

그의 나이 30 대 전후인 신문 왕 때, 우리 문학사 최초의 가전체(假傳體ㆍ사물을 의인화하여 전기 형식으로 적은 문학 양식) 작품인 '화왕계(花王戒)'를 남겼다.

 

 

 

 

 이번에는 요석공주 생각이 난다. 오늘은 그저 공주 타령이다. 어허허허허허~~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