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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03 중국-사천,감숙,신강:대륙의 비경(完

흉노! 훈! 흉노! 2

by 깜쌤 2005. 7. 18.


가보면 알게 되겠지만 초원에서의 절대적인 교통수단은 말(馬)이다. 오늘날에도 말은 초원에서의 삶에 절대적인 영향을 가지고 있는 동물인데 하물며 2천 수 백년 전의 상황에서야 말하여 무엇하겠는가? 유목민족 특유의 조직과, 말을 사용한 기동력은 정착 농경국가인 중국을 압도하기에 충분하였다.


 흉노국의 1대 선우인 두만(頭曼:기원전 209년 사망)은 흉노국을 성립하고 제 2대 선우인 모돈(冒頓:기원전 209-174년)은 재위기간동안 몽골리아를 중심으로 대제국을 형성하였다.

 

 모돈선우는 막강한 힘을 앞세워 동으로는 동호(東胡), 서로는 월지(月氏)와 오손(烏孫) 등, 오늘날의 중국 서쪽 국경과 인접한 키르키즈스탄 일대 지역을 복속시키고 남으로는 중국으로부터 오르도스(雲中) 지역을 회복하였다.


 오르도스는 황하가 'ㄷ'자 형으로 크게 물결치는 지방, 즉 오늘날의 서안과 낙양 북쪽 지방을 의미한다. 아래 지도에서는 만리장성 글자가 있는 은천 부근으로 짐작하면 틀림이 없다. 모돈선우에 의한 국토확장은 동으로 한반도의 북부, 북으로는 바이칼호, 서로는 아랄해, 남으로는 중국의 위수(渭水:지금의 서안)와 티베트고원까지 미치게 되는 것이다.

 

기원전 206년경 진을 멸망시키고 건국한 한나라는 초와의 전쟁으로 국내정세가 불안하였고 경제사정도 안정되지 않아 대외정책에는 관심을 둘 여지가 없었다. 어수선한 국내여건을 무시한 채 한 고조(漢高祖:기원전 206-195년) 유방은 흉노 정벌에 나섰다가 10여만의 대군을 잃고 포로로 잡히는 수모를 당한 끝에 기원전 198년에 흉노와의 화친정책을 맺게 된다.

 

 그 사건이 벌어진 곳은 위 지도에서 내몽고 자치구의 중심도시인 후어하오터(呼和浩特 Hohhot)오른쪽 대동(따뚜 大同)부근으로 여기면 거의 틀리지 않는다. 흉노와 맺은 약조 속에는 흉노의 선우에게 한나라의 공주를 출가시키고 일년에 수 차례씩 비단과 술과 음식을 바치며, 한과 흉노는 대등한 형제국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이러한 약속을 지키면 흉노는 한나라를 침공하지 않는다는 조약이었으니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치욕적인 약조나 다름없었다.


 이와 같이 융성하였던 흉노국은 한 무제의 끊임없는 흉노 정벌정책에 의한 원친근공(遠親近攻)의 전략과 역사에 유명한 실크로드의 개척자 장건, 장군 위청, 곽거병을 앞세운 한의 침공에 의해 서서히 세력이 약해지는 것이다.

 

 이제 나는 그 역사적인 사건들이 벌어졌던 무대를 찾아 떠나는 것이다. 그것뿐인가? 서안에서 우루무치, 카슈가르(카스 Kashi)로 이어지는 길은 왕오천축국전으로 유명한 신라의 구법승(求法僧 불경을 찾아 떠나는 중)혜초가 인도에서 귀국하며 밟아 나온 길이며 서유기의 삼장법사와 손오공, 사오정, 저팔계가 밟아나간 길이 아니던가?

 

 내 평생의 소원하나가 그 길을 밟아보는 것이었는데 이제 그 발걸음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가슴 설레는 일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한 무제의 끊임없는 흉노정벌과 실크로드 교역을 차지하기 위한 한나라와의 전쟁에서 밀리게 된 흉노는 동, 서 흉노로 분리되고 결국 서역지배권을 빼앗기게 되고 마침내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고 만다. 그러면서 그들은 어느 날 홀연히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만다. 사실 여기에는 많은 논란거리가 존재한다.  


 흉노의 멸망은 흉노족의 이동을 부르게 되고 서쪽으로 진출을 계속한 흉노는 오늘날의 중앙아시아 지역인 투르키스탄과 카자흐스탄을 경유하여 남부 러시아의 카스피해와 볼가강 유역으로 이동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서진(西進)을 계속한 그들은 유럽 동쪽에 출몰하게 되었고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게르만족의 대이동"이란 사건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