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하다가 커피 한잔으로 잠시 피로를 풀 때면 한 번씩 이 책을 보고 있어.
"정님이"
정님이라는 제목을 가진 시도 있어. 이시영 님의 작품이지. 나는 이 시를 읽으면 눈물이 나서 견딜 수가 없어.
정님이
이 시 영
용산역전 늦은 밤거리
내 팔을 끌다 화들짝 손을 놓고 사라진 여인
운동회 때마다 동네 대항 릴레이에서 늘 일등을 하며 밥솥을 타던
정님이 누나가 아닐는지 몰라
이마의 흉터를 가린 긴 머리, 날랜 발
학교도 못 다녔으면서
운동회 때만 되면 나보다 더 좋아라 좋아라
머슴 만득이 지게에서 점심을 빼앗아 이고 달려오던 누나
수수밭을 매다가도 새를 보다가도 나만 보면
흙 묻은 손으로 달려와 청색 책보를
단단히 동여매 주던 소녀
콩깍지를 털어주며 맛있니 맛있니
하늘을 보고 웃던 하이얀 목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지만
슬프지 않다고 잡았던 메뚜기를 날리며 말했다
어느 해 봄엔 높은 산으로 나물 캐러 갔다가
산뱀에 허벅지를 물려 이웃 처녀에게 업혀와서도
머리맡으로 내 손을 찾아 산다래를 쥐여주더니
왜 가버렸는지 몰라
목화를 따고 물레를 잣고
여름밤이 오면 하얀 무릎 위에
정성껏 삼을 삼더니
동지섣달 긴긴밤 베틀에 고개 숙여
달그당 잘그당 무명을 잘도 짜더니
왜 바람처럼 가버렸는지 몰라
빈 정지 문 열면 서글서글한 눈망울로
이내 달려 나올 것만 같더니
한번 가 왜 다시 오지 않았는가 몰라
식모 산다는 소문도 들렸고
방직공장에 취직했다는 말도 들렸고
영등포 색시집에서 누나를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어머니는 끝내 대답이 없었다
용산역전 밤 열한 시 반
통금에 쫓기던 내 팔 붙잡다
날랜 발, 밤거리로 사라진 여인
아련한 유년기의 추억을 담은 산문이지. 작가 김용택 시인은 굳이,
소설 영역의 글이 아님을 밝히고 있어.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47/0000048087?sid=103
컴퓨터 옆에 놓아두고 보기도 해. 많은 분량을 가진 긴 글이 아닌데도
일부러 천천히 보는 거야.
나의 유년기 시절 추억이 담긴 공간은 물속에 잠기고 말았어.
학교는 사진 오른쪽 잘록한 산허리 밑 부근에 있었어.
나는 그 고개로 난 길을 넘어 학교에 다닌 거야.
초등학교가 있었던 부근 몇몇 마을은 사진 속 이곳으로 옮겨갔고
학교도 여기로 옮겨갔어.
사진 오른쪽 윗부분에 보이는 큰 마을이
평은 마을이지.
예전에는 여기에 영은초등학교가 있었을 거야.
초등학교 앨범을 뒤적거려 보았어. 이젠 얼굴도 이름도 다 잊어버렸어.
누가 누구인지 구별도 잘 안돼.
남자로 태어나 살면서 가슴속에 정님이 같은 소녀를 한 명도 간직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조금은 불쌍(?)하지 않을까 싶기도 해.
인터넷을 마구 뒤져 어쩌다가 이 사진을 구했어. 이젠 누가 누구인지 구별하기도 어려워.
그럼 안녕!
어리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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