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국길! 그냥 해국길이라고만 말하면 무슨 뜻인지 모를 분도 많지 싶다. 해국이라는 말만 한자로 써보자. 해국은 海菊이라고 쓴다. 바다 해, 국화 국이다. 이젠 뜻이 명확해졌다. 바닷가에서 자라는 해국이 많은 길이리라. 정말 그랬다.
감포읍 안에는 해국길이라는 이름을 가진 골목길이 있다. 해국그림을 가득 품은 아름다운 길이다. 감포읍 여기저기를 연결한 깍지길의 핵심이기도 하다. 해국길은 읍사무소 부근에서 시작하여 시장 사거리 부근에서 끝이 난다. 그리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은 길이지만 먼저 살다간 선인(先人)들과 현재를 살고 있는 주민들의 정감이 가득한 아름다운 길이다.
해국길은 감포읍에서 준비한 회심의 역작이기도 하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랬다. 골목에는 위험투성이인 바다를 생의 터전으로 삼은채, 한편으로는 척박하고 마른 땅뙈기를 일구며 험난하게 살아온 감포인들의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있다.
해국의 생명력은 질김 그자체다. 약간은 목질(木質)을 띈 줄기를 가진 여러해살이 풀꽃이다. 우리가 아는대로 국화의 한종류라고 보면 된다.
가새쑥부쟁이, 개미취, 갯쑥부쟁이, 구절초, 미국쑥부쟁이, 벌개미취, 산국, 쑥부쟁이, 해국, 흰해국같은 식물이 국화류의 식물들이다. 모르는 사람들은 들국화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 부르기도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모두들 그 종류가 조금씩 다르다고 봐야한다. 해국이 있으니 산국도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해국은 바닷가에 자라는 국화류의 식물이라는 것을 저절로 알게 된다.
갯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강인함과 거칠음을 그 특징으로 한다. 나는 젊었던 날 바닷가의 학교에서 근무를 해본 적이 있다. 언제 어떤 사고를 당해 죽을지 모르는 것이 뱃사람들의 삶이어서 그런지 그들은 화끈하고 거칠었다. 대가 세고 기가 강했다. 갯마을 사람들의 기질을 해국만큼 잘 나타낸 식물이 있을까 싶다.
골목에는 해국들이 가득했다. 때로는 무더기를 지어, 때로는 한송이가 외롭게 애절한 자태로 피어있기도 했다. 모두들 가슴마다 느끼는 감정은 '추억 남기기'판에다가 휘갈겨두어도 좋겠다.
초록색 나무상자를 열면 필기도구가 보인다.
자세히 보면 경주지역사회의 저명인사들 글씨가 여기저기 남아있다. 나도 한마디 남기려다가 참았다. 외지에서 오실 손님들을 위해서 말이다.
골목에는 최근에 지어진 집들부터 일제강점기 시대의 집들까지 골고루 섞여있다. 그러니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기에는 그저그만이다. 작은 공간을 활용해서 기가 막히게 자리잡은 집도 여기저기 보인다. 마구 지나치지 말고 하나하나 살피면서 찬찬히 걸어볼 것을 권한다. 하얀집 앞에 자리잡은 짙은 나무색을 칠한 집이 좁은 공간을 잘 활용한 대표적인 집이 될 것이다.
한송이 해국과 삶의 밑천일 수도 있는 오토바이 한대!
그림 하나하나마다 이 골목길에 정감을 불어넣은 미술인들의 노고가 보인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흔한 길속에 스며들어 있는 근대화의 흔적과 역사의 아픔을 찾아내어 가치를 부여한 사람은 정말 대단하다.
나는 이 길속에서 정갈함을 맛보았다. 그림이라고 하는게 그렇다. 너무 짙은 색을 많이 쓰면 어딘가 탁해보이고 너무 옅은 색을 쓰면 맥이 없어 보이는 법이다.
어설프게 그리면 싸구려같은 느낌이 들어 천박한 인상을 주는 법이다.
해국길에는 그런 느낌이 없다. 서민들의 진솔한 흔적이 여과없이 묻어나는 곳이다.
민박집이 보였다. 어떤 집인지 들어가보지는 않았는데 다음에 새로 다시 갈 수 있다면 한번 들어가보아야겠다.
나는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는 것이 아쉬워서 한번씩은 뒤돌아보았다.
고민이 많아 적응하기가 어려웠던 청소년 학생들도 참여해서 골목길에 흔적을 남겼다고 하는데 바로 이 그림들이다.
그림을 따라가면 길을 잃어버릴 염려가 없었다.
탁하기만 했던 회색빛 시멘트 바닥에 그려진 꽃그림들은 무채색 풍경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해국은 가을에 핀다. 보라색이다. 보라색도 종류가 많다. 붉은 빛을 띈 보라색이 있는가하면 푸른빛이 묻어나는 보라색도 있다.
고대 로마에서는 보라색이 고귀함을 상징하는 색이었다. 제정 로마시대에 보라색 옷은 극히 지위가 높은 사람들만 입을 수 있는 색이었다.
해국에서는 그런 고귀함이 스며들어있는 것 같다.
골목길을 가다가 '우물샘 가는 길'이라는 표지를 찾았다. 우물이나 샘이나 같은 뜻을 가진 말이지만 그대로 쓴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이 골목에 터를 잡고 살았던 사람들이 옛날부터 그렇게 불러왔단다. 문법에 틀리는 말이라고 너무 시비삼지는 말기로 하자.
그 골목에서 나는 일본식 냄새가 나는 옛날집을 찾았다.
이집은 아무리 봐도 일본식이다. 담쟁이가 감고 올라간 굴뚝같은 저 기둥은 무엇일까?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건물 앞에 만들어진 슬라브집에서는 기름보일러의 굴뚝이 골목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시멘트 블록으로 만든 벽에 모진 생명을 붙인 담쟁이들은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에 나오는 최후의 이파리 하나를 연상케 했다.
여기에도 베어먼(베어맨)같은 무명화가가 살았을까? 담벼락에 바싹붙은 빨간 무당벌레 한마리가 애절함을 더했다.
나는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보았다. 길이 막힌듯 했기에 저절로 고개가 위를 향할 수밖에 없었다.
하늘이 파랬다.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란 하늘밑에는 회색빛 칙칙한 담에 말라버린 담쟁이 덩굴이 세월의 무상함을 안고 그대로 삭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어리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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