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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폐속의 주인공을 찾아서 3

by 깜쌤 2012. 6. 15.

퇴계선생은 1570년에 돌아가셨다. 선생이 승려 법련에게 도산서당과 농운정사를 짓게 하신 것이 서기 1557년 명종 12년의 일이다. 유학자가 건물 건축은 승려에게 부탁했다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지금 사진에 보이는 건물은 서광명실이다. 광명실은 도서관 구실을 했고 두채가 있었다는 사실은 지난 글에서 이야기를 했다.

 

 

진도문을 들어서면 도산서원 영역이 된다. 진도문 좌우에 있는 건물이 동광명실과 서광명실이 되는 셈이다. 혹시 착각을 하실 분이 있을까 싶어 정리를 하면 이렇다. 우리가 흔히 도산서원이라고 알고 있는 건물은 엄격히 말하면 도산서당도산서원의 영역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도산서당은 퇴계선생이 살아계실때 사람을 시켜 건축한 것이고 서원은 선생 사후에 후대인들이 건축한 것이다.  

 

 

처음 공사를 시작했던 승려 법련이 건물을 완공시키지 못하고 죽자 퇴계선생은 승려 정일(淨一)에게 건축을 부탁하여 완공시켰다. 서기 1561년의 일이다. 선생이 돌아가신 것은 그로부터 약 9년뒤의 일이다. 서원이 완공된 것은 선생이 돌아가신 해로부터 6년 뒤인 1576년인 것이다. 도산서원으로 사액된 것은 그 일년전인 1575년의 일이고......

 

 

 헷갈릴까 싶어 도산서원 홈페이지에서 서원의 연혁을 가져와서 소개해드린다. 문장은 수정하지 않았다. 출처는 http://www.dosanseowon.com/이다.

  • 1557년(명종 12) 승려 법련(法蓮)에게 도산서당과 농운정사를 건립케 함
  • 1561년(명종 16) 승려 정일(淨一)이 도산서당 완공
  • 1570년(선조 3) 퇴계선생 70세를 일기로 역책
  • 1572년(선조 5) 상덕사(尙德祠)에 위패 봉안 결정
  • 1574년(선조 7) 유림의 공의로 사당을 짓고 서원 설립(진교당, 동.서재)
  • 1575년(선조 8) 서원 낙성, ‘도산서원(陶山書院)’으로 사액됨
  • 1576년(선조 9) 도산서원 완공, 위패 봉안, 시호 문순(文純)
  • 1610년(광해군 2) 문묘에 종사(從祀)
  • 1615년(광해군 7) 사림이 월천(月川) 조목(趙穆) 선생을 종향(從享)
  • 1792년(정조 16) 정조 임금이 치제(致祭)를 내림, 도산별과(陶山別科)시행
  • 1796년(정조 20) 시사단(試士壇)을 세움
  • 1819년(순조 19) 장서고(藏書庫)인 동광명실(東光明室) 건립
  • 1870년(고종 7)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서 보호됨
  • 1930년(경오년) 서광명실(西光明室) 증건(增建)
  • 1932년(임신년) 하고직사(下庫直舍) 이건
  • 1969년 도산서원 일대를 사적 170호로 지정, 문화체육부 복원.정리사업 시행
  • 1970년 유물전시관 옥진각(玉振閣) 건립
  • 1973년 시사단,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 33호로 지정
  • 1977년 도산서원관리사무소 설치, 관리운영조례 제정 공포
  • 2003년 장판각(藏板閣) 목판 2,790장 한국국학진흥원으로 이관

 

홈페이지에 소개된 글을 조금 인용해보자. 출처는 홈페이지다. 주소를 새로 소개해드린다.

 

                                            http://www.dosanseowon.com/

 

 

도산서원은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1574년(선조 7)에 지어진 서원으로 경북 안동시 도산면(陶山面) 토계리(土溪里)에 위치하고 있다. 서원의 건축물들은 전체적으로 간결, 검소하게 꾸며졌으며 퇴계의 품격과 학문을 공부하는 선비의 자세를 잘 반영하고 있다.

 

도산서원은 건축물 구성면으로 볼 때 크게 도산서당과 이를 아우르는 도산서원으로 구분된다. 도산서당은 퇴계선생이 몸소 거처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고, 도산서원은 퇴계선생 사후 건립되어 추증된 사당과 서원이다.


도산서당은 1561년(명종 16)에 설립되었다. 퇴계선생이 낙향 후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을 위해 지었으며 서원 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퇴계선생이 직접 설계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때 유생들의 기숙사 역할을 한 농운정사와 부전교당속시설인 하고직사(下庫直舍)도 함께 지어졌다. 도산서원은 퇴계선생 사후 6년 뒤인 1576년에 완공되었다.

 


 

 

1570년 퇴계 선생이 돌아가시자 1572년에 선생의 위패를 상덕사(보물 제211호)에 모실 것을 결정하였다. 2년 뒤 지방 유림의 공의로 사당을 지어 위패를 봉안하였고, 전교당(보물 제210호)과 동·서재를 지어 서원으로 완성했다.


1575년(선조 8)에 한석봉이 쓴 "도산서원"의 편액을 하사 받음으로써 사액(賜額)서원으로서 영남유학의 총 본산이 되었다. 1615년(광해군 7), 사림이 월천(月川) 조목(趙穆,1524-1606) 선생을 종향(從享)했다. 도산서원은 주교육시설을 중심으로 배향공간과 부속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전체 교육시설은 출입문인 진도문(進道門)과 중앙의 전교당(典敎堂)을 기준으로 좌.우 대칭으로 배열되어 있다. 동.서로 나누어진 광명실(光明室)은 책을 보관하는 서고로서 오늘날의 도서관에 해당한다. 동.서재는 유생들이 거처하면서 공부하는 건물이다.

 

 

 

 

 네모테 속에 들어있는 글이 조금 어렵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내 입장에서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 낱말이 몇개 보인다. 동광명실쪽 담장 끝머리에 참새 한마리가 날아와 앉았는데 녀석은 도대체 사람 무서운줄을 모르는 것 같았다.   

 

 

세상 모든 사람이 기록에 남아있는 퇴계선생의 인품같다면야 짐승이 사람을 두려워할 일이 있겠는가 싶었다.

 

 

유가(儒家)에서는 '어짊'을 중요시했다. 진정으로 어진 사람은 동식물까지도 알아보는 모양이다.

 

 

 도산서원의 핵심건물인 전교당을 마주보고 섰을 경우 마당 오른쪽에는 박약재가 있고 서쪽에는 홍의재라는 건물이 있다. 보통 서원에서는 일반적으로 동재, 서재라고 부른다. 지금 사진의 왼쪽에 보이는 것이 서재인 홍의재(弘毅齋)다.  

 

 

동편 건물은 박약재(博約齋)다.

 

 

도산서원이라는 현판이 붙은 중앙의 대청마루가 전교당이다. 요즘 학교로치면 강의실에 해당한다.

 

 

동재와 서재는 서원에서 공부하는 유생들의 숙소라고 보면 틀리지 않을 것이다.

 

 

앉아서 구경하다가 일어나서 갈때엔 유래를 적은 안내문을 휙 던지고 가버린다. 그런 사람들이 이런 곳에는 왜 오는 것일까?

 

 

전면에 보이는 도산서원이라는 글씨는 석봉 한호의 글씨라고 한다.

 

 

석봉선생의 글씨라서 그럴까? 은근히 한번 더 눈길이 갔다.

 

 

전교당 여기저기에는 크고 작은 글씨들이 쓰여있는 판들이 제법 걸려있었다.

 

 

나는 전교당 옆을 돌았다. 뒤쪽에는 보통 사당이 있으므로 확인해보려는 것이다.

 

 

짐작이 맞았다. 퇴계선생의 위패를 모신 상덕사(尙德祠)가 나를 맞아주었다.

 

 

전교당 뒤 왼쪽에는 전사청(典祀廳)이 자리잡고 있다.

 

 

 전사청은 서원에서 제사를 드릴때 필요한 용구를 보관하는 장소인 동시에 제사용 음식을 장만하는 공간으로 쓰인다. 전사청이나 상덕사같은 공간을 배향공간이라고 부른다. 도산서원에서는 매년 봄과 가을에 제사를 드리는 모양이다.  

 

 

나는 다시 내려가서 장판각에 가보기로 했다.

 

 

전사청 건물이 있는 곳에서 전교당을 내려단 본 모습이다.

 

 

대청에 달린 문을 다 열어두어서 그런 느낌이 들었겠지만 그지없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동재와 서재, 그리고 진도문이 보인다. 상덕사에서 더 오른쪽으로 나가면 장판각 건물이 나온다.

 

 

장판각(藏板閣)은 이름 그대로 서원에서 찍어낸 책의 목판본을 보관하던 장소다. 장판각이나 동서광명실은 중국 무협소설에 등장하는 소림사의 건물로 치자면 달마역근경같은 무림비전이 보관되어 있다는 식으로 부풀리던 장경각에 해당하리라. 지금 소림사 장경각은 비어있다. 도산서원 장판각처럼.....

 

 

오늘날은 컴퓨터를 이용하여 종이에다가 쉽게 인쇄하여 책을 만들어내지만 옛날에는 그렇지 못했다. 책을 만들때는 글자를 나무판에 새겨 판화를 찍어내듯이 찍어내었던 것이다. 그런 원판을 보관하던 곳이 장판각이다. 인쇄하지 못했던 책은 원본을 보고 옮겨적을 수밖에 없었으리라.

 

 

안내문을 보면 알겠지만 지금은 목판을 한국국학진흥원에 옮겨서 보관하는 중이다.

 

 

참으로 대단한 일을 해냈다. 시골 서원에서 그런 일을 해냈다면 정말 엄청난 일이 아니던가?

 

 

장판각  담너머로는 새로 돋은 홍단풍의 이파리 색깔이 다른 나뭇잎들이 지닌 연녹색과 대비되어 저 혼자만의 선명한 빛깔을 자랑하는듯 했다.

 

 

나는 다시 도산서원 전교당으로 돌아왔다.

 

 

이제는 내려갈 시간이 되었다.

 

 

진도문 건물에 달린 북이 눈에 들어왔다.

 

 

저 북은 무슨 일을 하는데 쓰였던 것일까?

 

 

공부하는 유생들에게 식사시간이나 공부시간 같은 것을 알리는 구실을 했을까?

 

 

자그마한 서원이지만 찬찬히 돌아보니 하나하나가 잔잔한 감동으로 밀려왔다.

 

 

정신을 차리고 사방을 둘러보니 외국인들도 제법 보였다. 그들은 어떤 연유로 여기까지 찾아온 것일까?

 

 

나는 이제 옥진관(玉振閣)으로 내려가려고 한다.

 

 

옥진관은 일종의 유물전시관이다. 퇴계선생이 친히 사용하셨던 귀한 유물들이 다수 보관되어 있는데 건물은 1970년에 만들어졌다. 이제 그리로 내려가는 중이다. 사진의 오른쪽에 보이는 기와집이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