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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교육, 초등교육/내반 아이 일류만들기

아이들의 다툼은 이런 식으로 해결한다 2

by 깜쌤 2012. 6. 14.

 

지난 글에서는 아이들끼리의 다툼이 생겼을 경우에 교사가 사건을 처리하는 요령에 대해 이야기를 드렸습니다만 이번에는 아이들이 자기의 고충을 스스로 털어놓게 하는 기법에 대해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지금도 존재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예전에는 동네 골목마다 신고함이라는 것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골목이나 건물의 복도나 학교 현관 같은 곳에 작은 통을 매달아두고 신고할 내용을 적은 종이를 신고함 속에 넣어두면 관계기관이니 담당자가 고충을 처리해주겠다는 취지에서 운영했던 제도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경찰서같은 사법기관이나 시청같은 행정기관에서 운영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얼마나 효과가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근무한 어떤 학교에서도 아이들끼리의 다툼이나 교내폭력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내신고함제도를 운영해보았습니다만 효과는 부정적인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요즘은 인터넷이나 휴대전화같은 통신수단이 잘 발달되어 있어서 담임교사나 학교장에게 말로 직접 호소하거나 내용을 전하는 것이 훨씬 편하기에 신고함같은 제도는 점점 무용지물이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이런 추세는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신고함 같은 제도가 무용지물이 되어가는 이유는 신고의 불편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신고를 했을 경우, 관계당국에서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성의있게 일을 처리해주느냐 하는 문제에서 신뢰를 상실했기 때문에 유명무실하게 변했을 가능성도 상당히 높습니다.

 

민원인은 없는 시간을 투자하여 서류를 만들고 없는 용기를 내어 신고를 했는데 도리어 불이익이 돌아온다거나 관계기관이나 당국에서 성의있게 일을 처리해주지 않는다면 그 다음부터는 신고함을 이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을 보듯이 뻔한 일입니다. 학급에서 벌어지는 일을 처리하는 것도 마찬가지 원리가 작용합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학급안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해결해줄수 있는 사람은 일차적으로는 담임교사가 되지만 담임교사가 아이들이나 학부모들로부터 신뢰를 상실할 경우에는 감당이 안될 정도로 문제가 커지기도 합니다. 어떤 학교에 근무할 때 겪은 일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옆반의 수업 분위기가 어딘가 수상하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을 가지고 함부로 알아보려는 것은 동료교사로서 예의에 벗어나는 일이기도 하고 월권행위이기 때문에 본인이 이야기할때까지 기다렸습니다. 

 

문제는 졸업을 서너달 앞두고 터졌습니다. 아이들의 야유때문에 수업을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하게 된 옆반 선생님이 상담을 요청해와서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난 뒤에 비로소 사건의 실체를 알 수 있었습니다. 교사가 말만하면 아이들이 집단적으로 야유를 퍼부어서 수업진행 자체가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옆반 아이들을 불러 이야기를 들어본 결과 아이들로부터 자기들 담임선생님을 절대로 신뢰할 수 없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선생님이 아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일방적으로 함부로 이야기를 하고 판단을 하며 편파적으로 처리해왔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교사와 아이들간의 가치관 차이에서 벌어진 사건이었지만 요즘 아이들이 얼마나 영악한지 신뢰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선생님을 얼마나 우습게 보는지를 잘 깨달을 수 있는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교사의 언행에서 공정성과 객관성이 결여되면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를 새삼스레 느껴본 경우였습니다.     

 

  

 

교사가 아이들로부터 자기들 세상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나 고민을 마음놓고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 정도까지 신뢰를 얻는것은 보기보다 어렵습니다. 교사 자신부터 언행을 바르게 해야만 아이들은 교사를 신뢰합니다. 예전에 잡지에서 이런 이야기를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육이오 전쟁당시 중등학교 교사를 했던 어떤 여자 선생님이 어쩌다가 중학생아들이 있는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들 입장에서는 그 여선생님이 새엄마가 되는 것이니 마음문을 닫고 사사건건 반항을 하고 멸시하며 무시하는 일이 자주 있어서 마음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 선생님도 아주 많이 배운 분이라 마음문을 열고 다가가려했지만 아이들이 닫아놓은 마음문을 여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전래동화에 흔히 등장하는 그런 계모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낳아주고 길러준 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에서 오는 거부감을 어떻게 해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아이가 동네에 사는 어떤 아저씨로부터 심하게 맞고 들어왔습니다. 동네에서 마음대로 행동을 하는 어떤 남자가 이 선생님의 아이를 제법 혼내준 것이었는데 아이와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아이가 잘못한 일은 거의 없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낳은 자식이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자식이라고 생각한 어머니는 열에 받혀 그 동네남자를 찾아갔습니다. 워낙 행실이 고약했던 남자여서 다른 사람들이 모두 피해다녔던 남자였지만 이 여선생님은 죽기살기로 덤벼들었다고 합니다. 물론 처음에는 말로 시작된 싸움이었지만 나중에는 몸싸움이 벌어지게 되었고 교사라는 직업의식보다는 아이의 엄마라는 사실을 앞세운 여선생님의 독기어린 저항에 행실고약한 동네남자도 그만 손을 들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말로 몸으로 치고 받고 싸우는 장면을 숨어서 지켜보았던 중학생 아이는 며칠 뒤부터 완전히 행동이 달라지기 시작하더라는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여선생님은 자기가 직접 낳은 자식이 없이 늙었지만 전처가 낳은 자식들은 친어머니 이상으로 잘 대해주는 것은 물론이고 온갖 인생살이의 고민까지 다 상담을 해오는 진짜 아들들이 되었다고 합니다. 학급을 맡은 담임교사도 이 여선생님이 지녔던 마음가짐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아이들로부터 신뢰를 획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이들이 어리다고 그들을 무시하면 정말 곤란합니다. 초등학교 6학년 정도만되면 사리판단이 뚜렸한 아이들이 제법 많습니다. 담임교사가 자기들을 진정으로 위해주는 선생님인지 단순한 월급쟁이 선생인지 거의 다 알아차립니다.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선생님이라고 인식되면 아이들은 온갖 고민을 털어놓지만 단순한 생활인 수준의 선생님으로 받아들이면 그 순간부터 교사와 아이들간의 소통은 끊어지고 거대한 벽이 만들어지는 것이죠.

 

다음 글에서 계속하겠습니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