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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11 중국-대륙의 극과 극:산동, 청해성(完

이번에는 공묘(孔廟)를 본다 4 - 행단

by 깜쌤 2011. 12. 8.

 

 공자가 살아있을 당시에는 주로 어떤 공부를 하였을까? 공자는 지금부터 2500여년전의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중국 역사기록을 가지고 짐작을 해보면 공자도 처음에는 아마 역사를 위주로 공부했을 것이다. 

 

그리고 조상들로부터 전해져온 경전이나 문학작품들과 예악(禮樂)을 공부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그외에도 산수와 글쓰기와 활쏘기와 마차몰기와 말타기 등을 배웠을 가능성이 높다. 

 

 

공자 자신이 6예(六藝)에 능통했다는 사실에서도 대강 짐작해볼 수 있다. 6예란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에 관한 학문을 의미한다. 공자가 남긴 역사서로 '춘추'와 '시경'같은 시가집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고전(古典)에도 뛰어난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어(御)는 마차나 전차같은 것을 모는 기술을 의미한다.

 

중국에도 이집트나 헬라(고대 그리스)나 페르시아제국의 병사들이 사용했던 것과 유사한 모양의 전차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런 사실은 진시황의 병마용갱에서 나온 유적들을 통해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런 다양한 학식을 가진 공자였기에 이미 20대 초반부터 인근 지방에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던 모양이다. 공자의 스승이 누구였는지는 정확하게 잘 모른다. 어느 한사람을 특정 스승으로 삼아 공부를 했다기보다 여러 사람을 찾아다니며 배운 것이 아닌가 싶다. 공자에게 가르침을 준 사람들 가운데는 상당히 널리 알려진 인물도 있다.

 

예를 들면 노자(老子)같은 인물이다. 공자는 주(周)나라까지 가서 노자를 만나 뵙고 예(禮)에 관해 질문을 하기도 했다는데 이에 관해서는 당연히 다른 의견이 있기도 하다. 어떤 이들은 노자가 공자가 죽고난 뒤의 인물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공자의 스승은 과연 누구누구였으며 모두 몇명이나 되는 것일까?

 

 

공자는 20세 이전에 결혼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젊었던 날, 공자는 노나라에서 하급관리를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후에 공자는 고위직에 오르게 된다. 공자는 벼슬아치라고 하기 보다는 위대한 스승에 더 가까운 인물이었다.

 

사마천이 쓴 사기에 보면 공자의 제자들 이름이 줄줄이 등장한다. 안연(顔淵), 민자건(閔子騫), 염백우(伯牛), 중궁(仲弓)같은 인물이다. 널리 알려진 자공(子貢)같은 인물이 있는가 하면 계로(季路)와 자유(子游), 자하(子夏)같은 인물도 등장한다. 

 

 

공자가 24살이 되던 해, 그러니까 BC 528년에 어머니를 여의고 만다. 어머니가 겨우 마흔의 나이로 세상을 뜬 것이다. 공자는 삼년상을 지낸 후에도 계속해서 배움의 길에 정진했다고 한다. 

 

 

대성문을 들어서면 앞에 작은 건물이 하나 보인다. 그 너머로 엄청나게 큰 건물이 보이는데 그게 대성전(大成殿)이다. 대성전이 공묘의 핵심건물이나 마찬가지다. 대성전과 대성문 사이에 보이는, 규모가 대성전보다는 작은 건물이 행단(杏壇)이다. 바로 위 사진속의 건물이다.  

 

 

행단은 원래 대성전의 흔적이라고 한다. 공자가 휴식을 취하기도 하고 책읽기를 했던 장소였다고 <장자>라는 책 속에 기록되어 있단다. 장자 원문을 다 읽어보지 못했으므로'기록되어 있단다'는 식으로 쓸 수밖에 없다. 후세 사람들이 살구나무(어떤 이는 은행나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를 심고 정자까지 만들어서 행단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전한다.

 

   

2층 처마밑에 세로롤 걸린 현판에는 행단이라는 글씨가 뚜렸하다. 금나라 시대에 활약했던 서화가 당회영(黨懷英)의 작품이라고 한다. 당회영이 어떤 사람일까 싶어서 동아출판사에서 나온 동아세계대백과사전을 뒤져보았는데 그 항목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대만 야후에 접속해서 자료를 찾아보았다. 대만의 위키피디어에 올라온 그에 관한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당회영(党懷英)은 1134년에 태어나서 1211년에 죽었다고 전한다. 당시는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가 한창 위세를 떨칠때이니 당회영은 금나라가 중국 북부를 점령하고 있을때 활동한 인물이 된다.

 

그의 약력을 이 글속에서 자세히 다 전할 수는 없지만 학문적으로도 상당한 경지에 올랐던 인물로 보인다. 한림학사 자리에까지 올랐다니 말이다. 원래 출생은 지금의 산동성 태안출신이라고 한다. 그는 죽은 뒤 현재의 태안시(泰安市) 교구(郊區) 서왕촌(西旺村)에 묻혔다고 전한다.

 

 

대성문과 행단 사이에도 용을 새긴 돌조각이 하나 남아있는데 솜씨도 범상하지 않을뿐더러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 것처럼 보여졌다. 용조각을 많은 사람들이 어루만져서 그런지 손때가 묻어 반들거렸다.

 

 

우리는 향단으로 올라갔다. 뒤를 돌아다보았더니 아래의 사진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관광객들이 용조각을 둘러싸고 구경하고 있었다.

 

 

행단 내부에도 돌비석이 보였다. 우리가 건물 모퉁이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데 누가 툭툭치더니 비켜달라는 시늉을 하며 뭐라고 말을 했다. 남이 사진을 찍고 있으면 조금 기다렸다가 찍는 것이 도리이건만 자기 편리를 위해 툭툭치면서 비켜 달라고하는 것은 무례한 행동이다.

 

더구나 여기는 행단이다. 공자가 공부를 하고 휴식을 취했던 장소였다. 시도때도 없이 공자를 자랑하는 중국인이 그렇게 나오면 곤란하다. 내가 영어로 한마디 해주었더니 두사람 얼굴색이 순식간에 변하더니 눈이 동그래졌다. 공자가 꿈꾸던 세상은 예(禮)와 덕(德)이 넘치는 세상이 아니었던가?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