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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11 중국-대륙의 극과 극:산동, 청해성(完

이번에는 공묘(孔廟)를 본다 2

by 깜쌤 2011. 12. 5.

 

  공묘(孔廟)는 공자의 사당을 의미한다. 무덤이 아니다. 중국인들이 쓰는 간자로 나타내면 孔庙라고 쓴다. 중국어는 성조가 있으므로 소리를 나타내기가 힘들지만 굳이 우리 발음으로 옮기면 콩미아오 혹은 콩마오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몇장의 사진을 보면 단번에 짐작하겠지만 규모는 정말 크다. 거짓말을 조금 보태면 나랏님이 사는 대궐 정도라고해도 된다.

 

  

여기에는 거쳐야 하는 문들이 정말 많다. 돌기둥으로 된 이 문에는 지성묘(至聖廟)라는 글씨가 선명하다. 성스러운 사당에 이른다는 뜻도 되겠고 성인의 사당에 이른다는 의미도 되겠다.

 

 

구조도를 보기로 하자. 이 정도면 대궐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성시문(聖時門)이라는 현판이 붙은 이곳이 입장권을 받는 문이다. 표를 여기에서 사는줄 알고 그냥 들어왔던 우리들은 입장권 구입을 위해 다시 돌아나가야만 했다. 입장권 판매소는 성벽부근에 있었다.

 

 

우리는 다시 돌아나가서 입장권을 샀다. 매표소의 모습이다. 공묘와 공부 공림을 다 볼 수 있는 입장권은 거금 150원이다. 공부와 공묘는 서로 옆에 붙어있으니 쉽게 볼 수 있지만 공림은 시외곽에 있으므로 걸어나가야했다.

 

우리는 두말없이 세군데를 다 볼 수 있는 입장권을 구했다. 맹부와 맹묘를 함께 볼 수 있는 입장권은 40원이었는데 여기는 4배 정도인 150원이나 한다. 우리돈으로 치자면 2만6천원 정도다. 엄청 비싸다.

 

 

이제 성시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다.

 

문을 통과해서 안으로 들어서면 맹묘에서 보는 것처럼 커다란 정원이 나타난다. 측백나무 같은 나무도 보였다. 오래되어 말라죽은 고목이 있는가하면 새로 심은듯한 어린 나무도 보였다.

 

중국 3대 궁전건축이라고 하면 보통은 자금성피서산장공묘를 꼽는다고 한다. 공묘는 공부, 공림과 함께 삼공(三孔)이라는 이름으로 1994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고적지에서 팔리는 음료수의 가격을 시중가격과 비교해보자는 의미에서 자판기를 찍어보았다. 찬물은 3원, 콜라는 5원으로 가격이 매겨져 있었다. 당연히 비싸다.

 

 

좌우로 펼쳐진 정원은 꽤나 넓다. 여기를 통과해 안으로 들어가면 제법 규모가 큰 돌다리가 나온다.

 

 

벽수교(璧水橋)라는이름이 붙은 다리다. 벽(璧)자는 둥근 옥(玉)을 나타낸다.

 

 

벽수교 앞에는 홍도문(弘道門)이 있다.

 

 

벽수교 양편으로는 아름다운 돌다리가 자리잡고 있었다.

 

 

우리는 홍도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홍도문을 들어서면 또다른 정원이 펼쳐진다. 구중궁궐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대중문(大中門)이다. 무슨 문들이 이렇게 연이어 나타나는지 모르겠다.

 

 

안에 들어와서 보았더니 단청칠이 벗겨진 모습도 보였다.

 

 

맹묘에서도 그랬지만 공묘 곳곳에도 비석들이 즐비하다. 여기 있는 비석들을 다 합한다면 약 2천개 가량이 된다니 어머어마한 숫자다.

 

 

워낙 비석이 많다보니 가치있는 것들도 제법 된다. 부서진 흔적이 보이는 것도 있었다.

 

 

성화비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성화제가 글을 쓴 모양이다. 성화비는 대중문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갈 경우 오른쪽에 보이는 것이다. 주견심(朱見深)! 1447년에 명나라의 황제로 즉위한 성화제(成化帝)의 이름이다. 1487년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으니 우리나라 역사와 비교하면 조선시대 초기에 해당한다. 성화제는 명나라의 8대 황제였다. 

 

비석 윗부분을 떼어바른 흔적이 남아있다. 우리가 흔히 중국이라고 알고 있는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 모택동이 통치하던 시대 후반의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파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구습을 타파한답시고 귀한 문화유산을 아낌없이 때려부수었던 광란의 시기가 그리 오래전 일은 아니었다.

 

 

이 짐승은 무엇인지 모르겠다. 전체적인 모양은 거북인데 코모양으로 보아 영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귀모양도 수상하다.

 

 

비정 속에 들어있는 것은 홍무비 아니면 영락비이다.

 

 

대중문을 들어서서 보았을때 오른쪽 비정이 홍무비정이고 왼쪽편의 것은 영락비정이다. 비석 크기도 크거니와 아주 웅장하다.

 

 

비석을 보호하기 위한 정자까지 마련했으니 예사로운 비석은 아니다. 황제가 쓴 비석이란다. 

 

 

비정 안쪽으로 큰 누각이 보였다. 아마 규문각일 것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공묘의 분위기가 풍겨난다.

 

 

 비문을 새긴 돌이 아주 특이했다.

 

 

중국인들은 알고보면 참 대단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말이다, 이 비석에는 글씨가 없었다. 무자비(無字碑)인가 보다.

 

 

 이것은 영락비정이다. 영락제는 명나라의 3대 황제로서 1402년에 즉위했다. 조선이 건국한 것이 1392년의 일이니 통치시기는 조선의 건국연대와 아주 비슷하다.

 

 

규문각이 보였다. 저기를 통과해서 안으로 들어가면 13개의 비정(碑亭)이 있는 공간이 나온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