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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11 중국-대륙의 극과 극:산동, 청해성(完

이번에는 공묘(孔廟)를 본다 5 - 대성전

by 깜쌤 2011. 12. 10.

 

  행단 구경을 마친 우리들은 공묘의 핵심건물인 대성전(大成殿)으로 나아갔다.

 

 

인(仁)과 덕(德)을 통치의 근간으로 해서 덕치국가(德治國家)를 만들어보고 싶었던 공자는 자기가 꿈꾸는 국가를 찾기위해 천하를 주유하게 된다. 공자가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나라는 (周)나라였지만 이미 시대는 변하여 패도정치(覇道政治)가 판을 치던 시대였으니 공자의 생각 자체가 인간 세상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이상이 되고 만 것이다. 

 

 

대성전 감상의 포인트는 기둥과 처마가 아닐까 싶다.

 

 

대성전의 건축은 1103년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명이 대륙을 통치하던 1499년에 보수하면서 기둥에 용을 새겼다는데 이 조각이 기막히게 아름다워서 오늘날에는 대성전을 대표하는 구경거리가 된듯 하다.

 

 

 

대성전 건물을 보면 용이 조각된 기둥들이 즐비함을 알 수 있다. 건물 크기만 해도 굉장해서 중국 고건축물을 대상으로 해서 규모면으로만 따질때 손가락에 꼽힐 정도가 된다.

 

 

공자가 생존해있을 당시 그의 통치철학은 지배자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했지만 세월이 흐르고 나자 드디어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전국시대가 끝나면서 힘을 근간으로 하는 패도정치의 시대가 사라지자 그가 주장한 합리적인 도덕정치 철학이 빛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진(秦)의 뒤를 이은 한(漢)나라에서 드디어 공자의 도덕정치를 국가 통치의 중요한 이념으로 채택하게 것이다. 그 이후부터 공자의 가르침은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북 아시아에서 맹위를 떨치게 되었다. 

 

오늘날에 와서는 위대한 성인의 한사람으로 추앙받는 공자이지만 그도 개인적으로는 불행한 일을 많이 겪었다. 사랑하던 아들 공리(孔鯉)와 제자 안연(顔淵)이 자기보다 먼저 죽는 모습을 봐야만 했다. 그래서 그런지 말년에 공자는 고향에 돌아와서 제자를 기르며 저술활동에 전념했다.

 

 

공자의 대표적인 저작이 시경(詩經), 서경(書經), 춘추(春秋), 역경(易經)같은 책이다. 후진 양성에 최선을 다하던 그는 기원전 479년 일흔세살의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당시의 평균수명을 기준으로 할때 공자는 제법 장수한 축에 들어가리라. 사마천사기에 의하면 '6예'에 통달한 공자의 제자가 일흔두명이나 되었다니 정말 대단하다. 

 

 

공자가 죽은 뒤 2년이 지나서, 나라의 27대 군주였던 애공(哀公)이 공자의 집을 사당으로 삼은 것이 공묘의 시작이라고 한다. 기원 전 205년에는 한고조 유방이 공묘에서 제례를 실시하였다고 전한다. 이후로 12명 가량의 황제가 단순히 공자에게 제사를 드리기 위해 곡부를 방문하였다고 전한다. 

 

 

중국에서 황제의 상징물 가운데 하나가 용(龍)이었다. 그러길래 용조각은 아무 곳에나 함부로 새길 것이 아니었다. 이런 웅장한 건축물 기둥에 새길때는 특별히 신경을 써야했다.

 

 

1499년 홍치(弘治) 2년, 그러니까 명나라 효종때 대성전을 보수하면서 이 기둥에 용을 새겼다고 전한다. 사용된 돌 자체도 아주 특이했던 모양이다. 한구산(漢勾山)에서 나는 청석(靑石)중에서도 아주 귀한 어자석(魚子石)이라는 돌로 기둥을 썼다고 전한다. 아무리 봐도 조각한 솜씨가 범상치 않다.   

 

 

이 기둥들의 높이는 5미터 70센티미터 정도가 되고 지름은 약 80센티미터쯤 된단다. 기둥 아랫부분에는 사람들이 접촉하지 못하도록 철구조물을 시설해두었지만 아무 소용도 없는 것 같았다.  

 

 

황제가 여기를 방문할때마다 최고통치자들의 질투심을 유발하지 않도록 어떨때는 천으로 미리 기둥을 가리기도 했다고 전한다. 황제가 사는 자금성의 중심건물인 태화전 기둥에도 용조각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란다.

 

 

 그렇다. 아무리 봐도 정말 멋진 조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에서는 옛날부터 누른 색(黃色 황색)을 고귀하게 여겼다. 어떤 사람들은 노란색이라고 이야기하지만 노랑이라고 말하기보다는 누른 색으로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래서 황제가 사는 집의 기와도 누른 색이 나도록 했다. 여기 공묘의 몇몇 건물도 지붕을 누른 기와로 입혔다.  

 

대성전이라는 건물 자체의 위용도 대단하지만 기둥에 새긴 조각 솜씨도 보통이 아님을 깨닫는다. 베이징에 거주하는 황제가 실제 중국을 통치하는 권력을 가진 막강한 자였지만 공자처럼 대를 이어가며 인민들의 존경을 받아오지는 못했다. 그게 바로 이념을 만들어낸 자가 위대한 이유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