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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11 중국-대륙의 극과 극:산동, 청해성(完

이번에는 공묘(孔廟)를 본다 3

by 깜쌤 2011. 12. 7.

 

규문각(奎文閣)은 오늘날의 도서관과 비슷한 기능을 했던 건물이라고 보면 된다.

 

 

한눈에 척봐도 규모가 엄청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원에 가득 심겨진 나무들이 오랜 세월을 버티면서 보아온 역사를 증명해주는듯 하다. 이 건물은 서기 1018년에 창건되었다.

 

1018년이라면 송나라때 만들어졌다는 말이다. 처음에는 장서루(藏書樓)라고 불리웠다. 1191년, 그러니까 금나라때 다시 중건되었는데 이름을 규문각이라고 바꾸어 불렀다. 이 건물이 공묘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면 된다.

 

 

우리가 흔히 대만으로 부르는 타이완(혹은 자유중국)에서는 스승의 날을 9월 28일로 정하여 공휴일로 지킨다. 왜 하필 9월 28일일까? 그날이 바로 공자의 탄신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음력을 양력으로 옮겨 계산한 날짜다. 공자는 중국에서 국민스승 정도로 존경을 받는 인물이 된 것이다.

 

 

공자는 기원전 551년에 태어나서 기원전 479년에 죽은 인물이다. 그러니 지금부터 약 2,500여년전의 인물이라고 보면 된다. 참으로 공교롭게도 공자는 석가모니, 소크라테스와 거의 동시대에 활동했다.

 

 

규문각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면 좌우로 자주빛 벽을 지닌 건물들이 늘어서 있음을 볼 수 있다. 안쪽을 보고 섰을때 오른쪽에 일곱채, 왼쪽에 여섯채의 집이 있는데 집안을 보면 비석들이 하나씩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가 바로 13비정(碑亭)이다. 비정 속에 들어있는 비석의 수는 모두 53기다.

 

 

사진에서보는 것과 같은 비정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는 것이다.

 

 

건물 속에 들어앉은 비석이니 그리 만만한 물건들은 아닐 것이다.

 

 

금나라 시대의 비정이 2개, 원나라 시대의 비정이 2개, 청나라 시대의 비정이 9채나 자리잡았다. 금과 원은 우리 역사와 견주어 불때 고려시대에 해당한다. 청은 조선시대 후기에 해당하고...... 그러니까 서로 다른 시대의 건물이 한곳에 나란히 모여있는 것이다.

 

 

공자의 본명은 (丘)이고 자는 중니(仲尼)이다. 공자라고 할때의 공이 성이고 실제 이름이 구(丘)가 된다. 한나라 시대의 역사가였던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에도  공자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제자들에 관한 기록이 공자 자신에 대한 기록보다 훨씬 많다.

 

 

공자의 아버지는 나라의 하급무사였던 숙량흘(叔梁紇)이라는 사람이었는데 공자가 세살 정도였을때 세상을 뜬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머니는 안징재(顔徵在)라고 전해진다. 공자의 어머니가 이구산(尼丘山)에서 치성을 드려 아들을 낳았는데 태어난 아이의 머리가 제법 들어갔기 때문에 이름을 언덕 (丘)자로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공자는 공부하는 것에 커다란 즐거움을 느껴 열다섯의 나이에 '뜻을 세웠다'고 나중에 논어(論語)에서 회고했다. 뜻을 세운다는 의미의 입지(立志)라는 말이 생긴 유래다. 논어에 나오는 말이다. 원문은 아래와 같다.

 

子曰, 十有五而 志于學, 三十而 立, 四十而 不惑, 五十而 知天命, 六十而 耳順.....

 

"공자가 말하기를,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에는 섰으며 마흔에는 미혹되지 아니하였고 쉰이 되어서는 하늘이 내게 명한 뜻을 알게 되었고 예순에는 귀가 순해졌으며....."

 

 

나같이 평범한 범인(凡人)은 문장 속에 담긴 심오한 뜻을 읽어도 잘 모르고 들어도 무슨 말인지 잘 모른다.

 

 

공자의 어머니는 남편과 나이차가 꽤 있었다고 한다. 태어나서 공자 나이 겨우 세살 경에 아버지를 여의었다고 하는데 당시 어머니의 나이는 열여덟정도였던 모양이다. 공자는 우리나라로 치자면 몰락한 하급 선비집안 출신이다. 당시 중국 계급으로 치자면 사인(士人)에 속해 있었다고 한다.

 

 


공자는 타고난 공부체질이었던 모양이다. 열다섯살 정도가 되어서 늦게 공부를 시작했다고 하는데 그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공부했다고 한다.  

 

 

어쨌거나 그는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양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인물이 되었다. 

 

 

 그를 추모하는 사람들은 수없이 많은 글을 종이에 남기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돌에다가 글씨를 새겨서 남기기도 했다.

 

 

 그 흔적이 13비정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공묘를 찾아오는 관광객의 숫자는 이루 헤아리기조차 어려울 정도다.

 

 

 13비정을 보고나서 더 안으로 들어가려면 이번에는 대성문을 지나쳐야 한다.

 

 

 대성문을 앞에서 보면 기둥부터가 그 모양이 범상치 않음을 느낄 수 있다.

 

 

기둥에는 용이 새겨져있는데 대단한 생동감을 느끼게 해준다.

 

 

아랫부분은 철망으로 감싸두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손을 넣어 어루만져서 그런지 용의 몸체는 손때가 묻어 반들반들했다.

 

 

사람 손때가 무섭긴 무섭다.

 

 

조각을 한솜씨도 보통이 넘는다.

 

 

사람의 손때가 가득 묻은 기둥의 허리 부분은 색깔자체가 다르다.

 

이제 대성문을 들어서려고 한다. 여기를 지나면 대성전이 되는 것이다.

 

 

드디어 문지방을 넘었더니.......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