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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11 중국-대륙의 극과 극:산동, 청해성(完

이번에는 공묘(孔廟)를 본다 6 - 공택고정

by 깜쌤 2011. 12. 12.

 

대성전 뒤에는 침전(寢殿)이 자리잡고 있다. 두 건물은 거의 붙을듯 말듯 가까운 거리를 두고 자리잡고 있었다.

 

 

침전이라면 자는 방이 있는 건물을 말한다. 침전의 크기도 만만치 않았다.

 

 

건물 주위를 둘러싼 돌기둥이나 난간의 아름다움도 예사로운 정도가 아니었다.

 

 

공자의 초상을 어디에서 사진찍었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가장 널리 알려진 공자의 모습 가운데 하나이다. 학자다운 풍모가 얼굴에 그득하다. 인터넷상에서는 공자가 동이족의 후손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상당히 많이 떠돌아다니고 있다. 중국인들이 들으면 그게 무슨 소리냐고 펄쩍 뛸 일이겠지만 영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침전을 보고 난 뒤 우리들은 동로(東路)쪽으로 나갔다. 바로 아래 사진을 보자. 공묘의 구조를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자료다.

 

 

대성전을 가운데 두고 담장을 쳐서 구역을 지른뒤(사진 속에서는 초록색 담) 오른쪽 구역과 왼쪽 구역을 구별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우리들은 동쪽 구역, 그러니까 오른쪽으로 구경을 갔다는 이야기가 된다.

 

 

워낙 건물이 많은 곳이어서 나중에는 그만 질려버리고 만다.

 

 

그렇다고 해서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깝다.

 

 

두번 찾아올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공자를 연구하는 전문적인 학자라면 자료 수집을 위해서라도 다시 찾아오겠지만 그런 정도는 아니니 이왕 온김에 발품을 팔아가며 여기저기 둘러보는 것이 현명한 일이리라.

 

 

공묘안에 자리잡은 건물 벽의 색깔은 거의가 붉은 빛이 도는 자주색이었다.

 

 

우리는 쪽문을 통해 동로(東路)쪽으로 나갔다.

 

 

숭성사(崇聖祠)라는 건물이다. 동로쪽에 자리잡고 있다. 속에는 다양한 족자들이 보였다. 

 

 

숭성사의 기둥 속에 자리잡은 용은 인상이 제법 험하다.

 

 

 

대성전(大成殿)이 아니더라도 용을 새긴 기둥은 자주 보였다.

 

 

노벽(魯壁)의 모습이다. 아주 유명한 역사가 숨어있다는 벽이다. 분서갱유(焚書坑儒)사건과 연관이 있는 벽이기 때문이다. 잘 알다시피 '분서갱유'란 책을 불사르고 유학자들을 땅에 묻었다는 뜻이다.

 

춘추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중국 대륙에 최초의 거대 통일제국을 이룩한 이가 진시황(秦始皇) (政)이다. 진(秦)나라의 초대황제인 진시황의 이름이 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진시황 정의 성은 (呂)씨라고 한다. 그러니 성은 여씨요 이름은 '정'이라는 말이된다. 하지만 실제 진나라 왕실의 성은 여씨가 아니었다.

 

 

진시황이 여불위(呂不韋)의 자식이라고 경멸한 뜻에서 그런 주장을 한 것으로 보인다. 사마천은 한(漢)나라를 섬겼는데 한은 진을 무너뜨리고 세워진 나라이니 진나라에 대해 좋게 서술할 일이 없는 것이다. 진시황 정, 그러니까 시황제는 법가(法家) 계통의 정치가들을 중용(重用)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영웅>(英雄)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이연걸이 진시황 정을 암살하려고 시도하는 자객으로 나온 영화다. 감독은 장이모였다. 중국인 특유의 민족의식을 넘어서지못한 장이모 특유의 역사관때문에 나중에 한바탕 곤욕을 치룬 사실이 있지만......

 

진시황이 암살의 위협 속에서 그나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은 어찌보면 진나라의 엄격한 법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진시황이 진나라를 강성하게 만든 것은 사실이다.

 

진나라를 대륙의 강자로 만든 것은 진시황의 공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법에 의한 통치를 강조하던 법가의 근본정신을 존중했던 상앙이나 이사 같은 사람을 중용한 것도 무시할 수 없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고 난 뒤 이사(李斯)를 중용해서 통일제국의 기틀을 굳게 다져나갔다.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시황제가 발탁해서 중용했던 행정가들은 법가에서 강조하는 기본 사상에 밑받침을 둔 여러 정책을 치밀하게 시행해나갔다.

 

이런 흐름에 반발한 것이 유가를 중심으로 한 다양한 사상가들이다. 당시의 중국에 법가와 유가 사상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제자백가(諸子百家)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춘추전국시대에는 온갖 학설과 주장들이 난무했었다.

 

대략 손꼽아 보아도 유가(儒家), 도가(道家), 묵가(墨家), 법가(法家), 명가(名家), 병가(兵家), 종횡가(縱橫家), 음양가(陰陽家) 등등이니 별별 종류의 사상이 다 있었다. 이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난 것이다.

 

약이 오른 진시황은 이사의 진언에 따라 명령을 내려  진나라의 역사기록과 의약·과 복술(卜術) 및 농업 관계 서적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몰수하여 불사르도록 지시했다. 동시에 이 명령을 위반하는 자나 유교 경전을 공부하는 자와 진시황의 통치를 비난하는 사람을 색출하여 모조리 형벌에 처하라고 명했는데 이것이 분서갱유 사건의 일부분이다. 

 

어처구니가 없는 이런 종류의 학문 탄압 때문에 귀중한 역사서적과 고서적들이 엄청나게 사라지고 말았다. 동양에서 진시황이 분서갱유 사건을 일으켰다면 서양에서는 줄리어스 시저(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도서관 방화사건(?)이 존재한다. 물론 우발적인 사건이 불의의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긴 했지만 말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와 그리스 중부에서 벌인 파르팔로스 회전(會戰)의 결과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알렉산드리아 시가전을 벌인 적이 있었다. 이때 로마군이 이집트군을 공격하다가 실수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태워버린 사건과 함께 분서갱유 사건은 인간이 저지른 가장 무지막지한 고대의 기록 말살사건으로 기록되고 만다,

 

진나라에서 유가의 책들을 모아서 불사르는 과정에서 공자의 후손들은 많은 책들을 이 노벽속에 넣고 밀봉을 함으로서 중요한 서적들을 후손에게 전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노벽(魯壁) 바로 앞에는 공택고정(孔宅故井)이라는 이름이 붙은 공자 집안의 옛우물이 아직까지 전해져 온다.

 

 

우물을 철망으로 덮어서 추락사고를 막도록 해두었다.

 

 

노벽 주위에는 우물과 비석들이 몇개 자리잡고 있었다.

 

 

노자를 나타낸 그림이지 싶다. 우리는 대강 그런 식으로 공묘를 둘러보았다. 모두가 다 헛것인 것을......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