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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깜쌤의 세상사는 이야기 : '난 젊어봤다' - 자유 배낭여행, 교육, 휘게 hygge, 믿음, 그리고 Cogito, Facio ergo s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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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11 중국-대륙의 극과 극:산동, 청해성(完

공자님 집은 이렇다 1

by 깜쌤 2011. 12. 14.

 

공묘를 둘러본 우리들은 동쪽으로 난 옆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공부(孔府)를 보기 위해서이다. 공묘가 사당이라면 공부는 개인집이다. 공자 후손들의 살림집이라고 봐도 틀린 말은 아니다.

 

 

나가는 문 부근에 기념품 가게가 있었지만 우린 거뜰어보지도 않았다. 나같은 사람은 기념품 안사는 것을 여행의 기본 방침으로 삼는다. 

 

 

공묘밖으로 나왔더니 어제 둘러본 기념품 거리가 펼쳐젔다. 조금만 걸어가면 공부이므로 거기까지 가는 동안만 진열된 상품들을 슬슬 훑어보았다.

 

  

몇몇 가게에서는 역사자료들을 진열해놓기도 했다. 사진속의 주인공들은 젊었던 닐의 모택동과 임표이리라. 임표가 왼쪽이다. 그렇게 친밀했던 두 사람이 나중에는 원수가 되었으니 세상살이 원리가 참 묘하기도 하다.

 

 

마오쩌뚱(=모택동)! 그의 일생을 두고 평가를 할때 공7과3(功七過三)이라는 사람도 있고 과(잘못한 일)의 비율을 더 높여서 보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그를 신적인 존재로 섬기는 사람도 있다. 功七過三이라는 말은 등소평이 모택동을 평가한 말로 알려져 있다.

 

우리는 무슨 연고인지 자기 지역 출신 지도자만을 떠받들어 영웅시하는 묘한 습관이 있다. 자기 고향 사람을 감싸고 도는 습관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인지라 나무랄 일은 아니지만 그것도 너무 지나치면 꼴사나움을 넘어서 역겨움을 불러 일으키는 법이다.

  

 

참 오랫만에 모택동의 아내였던 강청(江靑)의 사진을 보았다. 그녀의 본명은 이청운(李靑雲)이다. 우리가 지금 여행하고 있는 산동성 출신이니 여기 사람들에게는 특별히 각별한 존재로 여겨지는게 아닌가 싶다. 그녀의 호가 운학(雲鶴)이다.

 

 

우리는 공부로 들어간다. 입장권을 미리 사두었으므로 다시 사는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었다.

 

 

들어가는 문위에는 성부(聖府)라는 현판이 달려있었다. 성인이 살았던(사는) 집이라는 뜻이리라.

 

 

여기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곳이다. 공묘를 본 사람들이라면 거의 모두가 들르는 곳이니 그럴 수 밖에 없다.

 

 

입장권을 내는 곳 위에는 성인지문(聖人之門)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이곳의 모든 것은 모두가 성인과 관련이 있다는 말일까?

 

 

중광문(重光門)이다. 중앙통로 한가운데 자리잡아서 입구에 들어섰을때 저 멀리 보이는 안쪽을 가려주는 구실도 하는 것이리라.

 

 

이런 문은 언제 열리는 것일까? 1503년에 만들어진 문이라니까 500여년전의 구조물이라는 말이 되겠다.  

 

 

중요한 의식이 있을때 한번씩 열리는 모양이다.

 

 

우리는 다시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공부의 건물들도 자주빛으로 칠해두었다.

 

 

서양 역사에서 로마 시대만 해도 자주빛은 고귀함의 상징이었다.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양에서는 -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오리엔트라고 하는 중동지방을 제외하고 - 자주빛이 붉은 기운을 띄고 있다면 서양의 자주빛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보라색을 나타낸다. 로마의 원로원 의원들은 오늘날의 양복에 해당하는 토가 옷자락에 붉은색 옷단으로 장식할 수 있었다.

 

자주색으로 옷감을 물들이는 것은 고난도의 작업이었고 염료자체를 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총독이나 집정관이 되어야만 자주색 가운을 걸치는 것이 허용되었을 정도였다. 그만큼 자주빛은 거룩한 색으로 취급을 받았고 아울러 고귀함을 나타내는 상징이었던 것이다. 집정관은 요즘말로 하면 수상이나 대통령(?) 정도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공화정 로마에서 집정관은 임기가 1년이었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