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깜쌤의 세상사는 이야기 : '난 젊어봤다' - 자유 배낭여행, 교육, 휘게 hygge, 믿음, 그리고 Cogito, Facio ergo sum
  • 인생 - 그리 허무한게 아니었어요. 살만했어요
배낭여행기/11 중국-대륙의 극과 극:산동, 청해성(完

맹자의 집안을 살펴보다 1

by 깜쌤 2011. 11. 29.

 

맹묘(孟廟)가 맹자의 사당이라면 맹부는 맹자 집안의 생활공간으로 쓰이던 곳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맹자가 현재의 맹부(孟府)가 있는 그곳에 살았는지의 여부는 정확하지 않지만 어쨌든 맹자후손들의 거처가 되었다는 사실은 거의 확실한 것 같다.

 

 

맹묘에서 옆문을 통해 거리로 나서면 작은 도로를 만나게 된다. 이 도로를 건너면 곧 이어 맹부가 된다. 사진에서는 오른쪽 붉은 담이 맹묘이고 왼쪽편으로 하얀 담장이 살짝 보이는 곳이 맹부인 셈이다.  

 

 

맹부가 있는 이면도로에는 아성이라는 현판이 붙은 커다란 문이 도로위에 걸쳐져 있다.

 

 

제법 고풍스런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도로다. 문이 있는 곳에서 왼쪽으로 살짝 꺾어들면 맹부입구가 나타난다.

 

 

 

잠시 이해를 돕기 위해 지도에서 위치를 소개하고자 한다. 위 지도에서 제일 위 옥색점이 찍혀있는 도시가 태안(泰安)이다. 나중에 우리가 방문하게 된다. 태안 시가지를 끼고 태산(泰山 타이샨)이 있다.

 

중간에 빨간 점이 찍혀있는 도시가 맹자의 고향인 곡부이다. 산동성 서남부에 노나라가 있었다고 보면 된다. 지금 지도에 나타난 이 지방이 춘추시대에는 노나라의 영토였을 것이다. 물론 일부는 추나라의 영역이었을테고.......  오른쪽의 분홍색 점은 연주이다. 우리는 연주에서 기차를 내려 태안으로 이동을 했었다.

 

아래쪽에 노란색 점이 찍혀있는 도시가 추성이다. 추성(혹은 추현)이 바로 맹자의 고향이다. 지금 우리가 구경하고 있는 맹묘와 맹부는 추성에 있다. 곡부에서 남쪽으로 약 25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고 보면 된다.

 

 

 

이 사진은 구글 위성지도를 편집한 것이다. 초록색 점이 있는 위치가 아성전이고 옥색점은 맹묘 입구를 나타낸다. 빨간점은 주차장이다. 노란색 큰 점은 아성이라는 이름이 붙은 도로상의 문이며 분홍색 점과 노란 화살표로 표시된 곳이 맹부 입구를 나타낸다. 맹묘와 맹부는 작은 도로를 사이에 두고 붙어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여기가 맹부 입구이다. 사진 왼쪽의 붉은 등이 걸려있는 곳이다.

 

 

맹묘 서쪽에 맹부가 자리잡고 있다. 맹부를 다른 말로 아성부(亞聖府)라고도 한다. 여기가 바로 맹자의 후손들이 살던 곳인데 금나라와 원나라때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위성사진으로만 보아도 면적이 제법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전을 찾아보았더니 맹부안에 약 150여개의 방이 있다고 하니 규모가 만만한게 아니다. 

 

 

대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가본다.

 

 

아성부(亞聖府)라는 현판글씨가 제법 단아함을 풍긴다. 문을 통과해서 안쪽으로 한걸음 내딛으면 바로 아래 사진처럼 멋진 풍경이 펼쳐진다.

 

 

그럼 이쯤에서 맹자 집안의 내력을 대강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맹씨의 근본은 노(魯)나라 15대 군주인 환공(桓公)의 둘째 아들인 경보(慶父 이때는 경보로 읽는다)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본다고 한다. 맹자의 조상가운데 몇몇은 공자와도 잘 아는 사이였다고 전해지는데 대표적인 사람이 희자(僖子), 의자(懿子), 무백(武伯)같은 사람들이다.

 

맹자의 45대손이 맹녕(孟寧)이다. 서기 1037년 송나라 인종이 즉위한지 4년째 되던해 공자의 후손인 공도보(孔道輔)가 연주자사로 부임해와서 맹자의 후손을 찾던중 맹녕을 만나게 된다. 연주는 우리가 얼마전에 거쳐온 연주를 말한다. 공도보는 황제에게 맹녕을 추성의 주부(主簿)로 추천해서 재가를 받았다. 주부(主簿)라면 문서의 기록과 보존을 맡아보는 벼슬아치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맹녕으로부터 맹씨 집안은 다시 부흥을 했기에 맹씨 집안에서는 그를 중흥조(中興祖)로 섬기게 된다. 그 이후로부터는 맹씨 집안에서 많은 벼슬아치가 이어져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맹씨 집안이 공씨 집안으로부터 은혜를 입었다고나 할까. 

 

맹씨 집안이 역사가와 중국 백성들로부터 본격적으로 존경을 받게된 것은 금나라와 원나라때로부터라고 전해져 온다. 역성혁명까지 주장했던 맹자의 사상은 왕조국가에서는 용납하지 못할 위험천만한 사상이었으니 그가 몇몇 나라를 돌아다니며 자기의 생각을 펼치고자 했지만 거절당했던 것은 당연지사라고 하겠다. 

 

맹자가 죽고난 뒤 한동안은 맹자의 무덤조차 어디있는지 모를 정도로 까맣게 잊혀져 있었다. 그렇게 하기를 1300여년, 북송시대때 등장한 신유학자들이 맹자의 무덤을 찾아내자는 논의를 하게 되었고 이런 과정을 통해 맹자가 다시금 이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맹자의 무덤을 찾아다니던 중 맹모지(孟母池)라는 작은 못이 추성부근에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단서를 얻어 드디어 추현 북쪽에 있는 사기산(四基山)에서 맹자의 무덤을 찾게 되었다고 한다. 

 

맹자를 재평가하게되면서 맹묘가 만들어졌고 결국 맹자도 성인(聖人)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서기 1330년, 원나라의 문종이 맹자를 추국아성공(鄒國亞聖公)으로 봉하면서 맹자는 위대한 사상가로 재조명된다. 

 

맹자가 왕도정치(王道政治)를 부르짖은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인(仁)과 예(禮)를 강조한 공자와, 인(仁)과 의(義)와 신(信)을 바탕으로 왕도정치를 부르짖은 맹자의 사상은 힘으로 천하의 패권을 잡는 것을 추구하는 패도정치(覇道政治)와는 근본적으로 생각을 달리한다.  

 

 

아성부를 들어서서 첫마당을 들어서서 앞을 보면 다시 새로운 문이 등장하는데 현판에 새겨진 글이 의미심장하다. 예문의로(禮門義路)!

 

 

과연 맹부에 어울릴만한 문구다.  

 

 예문의로라고 이름 붙여진 문을 지나서 안뜰로 들어가보면 다시 하나의 문이 나타난다. 옆으로 이어진 담이 없는 독특한 구조의 문이다.

 

 

 뜰 좌우로는 벽돌로 쌓고 기와를 올린 단정한 집들이 나타난다.

 

의문(儀門)이라..... 儀라는 글자는 옳을 의(義)자에다가 사람 인(人)을 붙인 글자로서 어떤 모양같은 것을 나타내는 글자다. 여기 들어오는 자는 예의를 차려 모양을 단정하게 갖추라는 의미일까?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