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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11 중국-대륙의 극과 극:산동, 청해성(完

맹자의 고향을 찾아나서다 7

by 깜쌤 2011. 11. 28.

 

맹묘 안에는 고목들이 즐비했다. 그 중에서도 눈에 띄는 나무가 있었는데 바로 이나무다.

 

 

엄청난 고목이다. 느티나무는 확실히 아니다.

 

 

중앙통로를 벗어나 아성전을 중심으로 하여 둘러싸고 있는 회랑 옆으로 나가면 비석들이 가득한 곳이 보인다.

 

 

여기도 그냥 지나치기에는 너무 아까운 곳이다.

 

 

참고자료에 의하면 여기 비석들 가운데는 역사적 가치가 수두룩하다고 하지만 내가 이런 쪽에는 어두우니 그냥 스쳐지나가고 만다.

 

 

확실히 사람은 아는 것만큼 본다는 말이 맞다는 것을 느낀다.

 

 

평소에 한자공부를 게을리한 것이 후회스럽다. 비석을 지고 있는 이녀석은 거북이 같기도 하다.

 

 

중국의 역사도시인 서안에 있는 비림과 견주어볼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이 정도만 되어도 만만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일직선으로 심어진 오래된 나무들과 비석들의 조화가 꽤나 중후한 멋을 담고 있다.

 

 

담벼락의 색깔도 자주색으로 칠해서 작은 나라의 궁궐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나는 맹모전(孟母殿)으로 가보았다.

 

 

모교일인(母敎一人)이라......  맹자의 어머니는 한사람을 가르쳤을지 모르나 그의 아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스승이 되었다.

 

 

그렇다. 좋은 어머니가 훌륭한 자식을 만드는 법이다. 선생을 오래 하면서 깨달은 사실인데 확실히 문제있는 부모가 문제있는 자식을 길러낸다. 바른 정신을 가진 부모가 올바른 자식을 길러낸다는 말이 틀림없다. 사람사는 세상이므로 예외는 있다고 하지만 거의 변하지 않는 진리다. 

 

  

맹모전 앞을 지키고 있는 아가씨는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어서 일부러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다. 맹모전 기둥에 쓰인 글씨가 뭐더라?

 

 

맹자는 편모슬하에서 자라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훌륭한 품성을 지닌 어머니로부터 좋은 교육을 받았기에 아성(亞聖)이라는 칭호를 받는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

 

맹자 어머니의 현명한 교육열에서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와 맹모단기지교(孟母斷機之敎 혹은 단교지교)란 고사성어가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는지금 그 현장에 서있는 것이고.....

 

 


맹자 모자가 처음 살았던 곳은 무덤 근처였던 모양이다. 무덤 곁(어떤 이들은 공동묘지부근이었다고도 한다)에 살면서 자주 보는 것이 장례식이었으니 맹자는 곡을 하고 무덤을 만들며 놀았다. 이런 모습을 보며 맹자의 어머니는 자식을 기를만한 장소가 못된다고 생각해서 이사를 갔다.

 

 

다음에 이사를 갔던 곳은 시장부근이었다. 당연히 맹자는 장사치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어린 아들이 하루 종일 장사치 흉내를 내며 노는 모습을 보고 맹자의 어머니는 다시 이사를 가기로 마음먹고 행동으로 옮겼다. 

 

2300여년 전에는 시골마을에 오늘날과 같은 근대식 학교가 존재할 수가 없었을테니 어쩌면 글방 근처로 이사를 갔을지도 모른다. 이번에는 어린 아들이 공부하는 흉내를 내고 예의를 지켜 말하고 행동했으므로 안심을 하고 눌러 살았다는 이야기에서 만들어진 고사성어가 맹모삼천지교이다. 맹자의 어머니가 세번이나 이사를 간데서 얻는 가르침이라는 말이다.

 

 

 

고사성어에  얽힌 이야기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런 일이다. 더구나 그 현장에 와있다는데서 나는 크나큰 기쁨을 느끼는 것이다. 물론 '맹모삼천지교'나 '맹모단기지교'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음을 알고 있다. 무엇이 사실이든 간에 나는 그런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만으로 느끼는 바가 크다.

 

 

 

돌아나오다가 보니 또다른 비정(碑亭)이 보였다. 들어오면서 보았던 강희비정과는 분명히 다른 모습이다.

 

 

벽에 붙은 판을 보았더니 건륭비정(乾隆碑亭)으로 되어 있었다. 건륭제와 강희제는 모두 다 청나라때의 황제들이다. 강희제의 아들이 옹정제이고 강희제의 손자는 건륭제이다. 그들 3명의 황제는 청나라의 전성기를 이루었던 명군(明君)들이다. 건륭제는 공자를 존경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건륭제가 죽은 해가 서기 1799년이니 우리나라로 치자면 정조가 죽은 해와 비슷하다. 정조는 건륭제가 죽고나서 일년 뒤인 서기 1800년에 승하하셨다. 건륭제가 사망함으로서 청나라가 쇠퇴하는 것처럼 정조가 사망한 뒤 조선이 기울어졌던 것을 보면 묘한 인연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건륭제의 글씨가 여기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역사적인 가치가 존재한다고 볼 수 있겠다. 이런 행동을 흉내낸 인물이 중국 국가주석을 지낸 강택민이 아닌가 싶다. 지앙쩌민(江澤民 강택민)의 글씨가 중국의 사적지 곳곳에 보였기 때문이다. 

 

 

최근들어 언론매체에 강택민의 사망설이 한번씩 등장하고 있는데 그때마다 불사조처럼 살아나는 모습을 보였다. 대기원시보에 보면 강택민의 출세과정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연재되고 있다. 궁금한 분들은 아래 주소를 눌러보기 바란다.

 

http://www.epochtimes.co.kr/news/view.html?section=165&category=205&no=116790

 

 

건륭비정을 보고나서 우리는 맹부(孟府)를 보기 위해 옆문을 나섰다. 맹묘에서 맹부로 가는 길은 아주 쉽다. 옆문으로 나가 작은 길 하나만 건너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맹묘를 빠져나갔다. 맹부로 가기 위해서......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