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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11 중국-대륙의 극과 극:산동, 청해성(完

서녕의 밤은 홍가(紅歌)에 묻혀있었다

by 깜쌤 2011. 9. 17.

 

우리가 흔히 말하는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의 약자이다. 어떤 사람들은 중공(中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중공이라는 말속에는 중국을 지배하는 중국공산당(共産黨)이라는 의미도 같이 포함하고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중국은 엄연히 말하면 공산국가이다. 이것은 자본주의 국가가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그들은 공식적으로 공산당의 영도에 의하여 통치되는 공산주의(혹은 사회주의)를 칭하면서도 무늬뿐인 공산주의를 실시하고 있고 실제로는 자본주의 경제 형태를 하면서 일당 독재를 고집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안고있는 이런 구조적인 모순과 불합리한 체제는 언젠가 폭발할 날을 반드시 맞이하게 될 것이다. 역사의 흐름은 모순을 참고 견뎌낸 것이 아니라 항상 모순의 최정점에서 저항을 초래하여 새로운 체제와 이념을 형성하는 모습으로 진화해 왔다.

 

중국 대륙을 실제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일은 1949년 10월 1일이다. 중국의 새로운 수도로 결정된 북경의 천안문광장에서 모택동(毛澤東 마오쩌뚱)이 국가건립을 선언한 날이 바로 그날인 것이다. 우리가 흔히 타이완으로 부르는 대만은 정식명칭이 중화민국이다.

 

 

 

위 지도의 출처는 위키백과이다. 중국의 행정구역을 잘 보여주는 좋은 자료여서 가져온 것이다. 지도 오른쪽 아래 옥색으로 칠해진 곳이 대만이다. 대만의 맞은 편은 복건성이다. 위 지도에서는 푸젠으로 표시되어 있다. 푸젠의 왼쪽 옆은 장시이다. 한자로 쓰면 강서성(江西省)이라는 곳이 된다. 강서성에는 유명한 사적지가 몇군데 있다. 그 대표적인 곳이 정강산(井岡山)이라는 산인데 중화인민공화국 역사에서 결코 빠뜨릴 수 없는 곳이다.  

 

배낭여행기에 갑자기 중국공산당이 어쩌고저쩌고 정강산이 어쩌고저쩌고 해대니 의아하게 여기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는데 식사후 우리가 구경한 장면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여기서부터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슨 거창한 이야기를 꺼내려고 이렇게 복잡하게 시작하는가 싶은 분들은 그냥 사진만 구경하면 된다.

 

   

지금 우리가 구경하고 있는 곳은 청해성 공산당의 핵심건물이 모여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청해성의 심장부라고도 할 수 있겠다. 공산당 건물 앞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커다란 합창제를 열고 있었다. 중국에서 합창을 들을 수 있다니.... 나는 너무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산당 건물 계단에는 악대가 자리잡았고 이들을 둘러싼 군중 한가운에는 지휘자가 지휘를 하는 가운데 모두를 악보집 같은 것을 펴들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가까이 가보았다.

 

내가 악보집이라고 생각했던 책은 노래가사가 적힌 책이었고 나는 그 가사 가운데서 홍군(紅軍)이라는 말을 찾아내었던 것이다. 역시 내가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군중들은 홍군의 군가를 열창하고 있었다. 이 평화로운 나날들이 이어지는 곳에서 홍군가(紅軍歌)라니? 위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조금 과거로 되돌아가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강제로 나라를 빼앗긴 것이 1910년 8월 29일이다. 이른바 경술국치일로 알려진 날인데 학교에서조차 국사교육을 우습게 여기는 우리나라답게 아무런 행사도 하지 않고 지나간다. 분통터질 일이다. 그 다음해인 1911년에는 중국에서 만주족이 세운 나라인 (靑)나라가 그 수명을 다했다. 손문이 주도한 혁명세력이 청을 멸망시켰던 것이다. 이른바 신해혁명이다.

 

 

신해혁명이후 권력을 장악한 이가 원세개(袁世凱)다. 원(袁)자는 웃길 원자인데 원세개는 정말이지 웃기는 짓을 했다. 역사의 흐름에 어긋나는 반동적인 언행을 보였던 그는 공화국 총통의 자리에 올랐다가 나중에는 황제의 자리에 올랐던 것이다. 원세개는 1916년에 죽고만다.

 

그 다음 10여년간은 지방을 장악한 군인들의 통치시대였다. 세금징수권까지 확보한 군인들의 군웅할거시대를 우리는 군벌통치시대라고 부른다. 크게 보면 중화민국의 연속이겠지만 사회는 극심한 혼란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중국 건국의 아버지라고 추앙받는 손문조차도 군벌들에게 쫒기어 1922년에는 그의 세력기반인 광동에서 퇴출당해 상하이로 도망칠 정도였으니 그 혼란상은 말로 다한 것이나 다름없다.  

 

 

                                         <젊었던 날의 모택동>

 

1925년에 손문이 죽게된다. 손문의 뒤를 이어 권력을 장악한 사람이 장개석(蔣介石 장제스, 치앙 카이 삭)이다. 장개석은 철저한 반공주의자였고 국민당군 총사령관이었다. 그는 지방을 장악하고 있던 군벌토벌작전에 나서서 1928년경에는 중국 대부분의 지역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런 뒤 세운 정부가 남경(南京 난징)에 만들어진 국민당 정부이다.

 

 

장개석은 1927년에 공산당을 불법화시키고 도시지역의 공산주의자들을 제거하는 작전에 나섰는데 국민당군의 검거를 피해 공산당요원들은 소련이나 농촌지역으로 도망을 치게 된다. 이런 혼란의 시대에 혜성처럼 등장한 인물이 모택동이다.그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거느리고 강서성과 호남성의 경계지점에 자리잡은 정강산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중국대륙에 공산당 씨앗을 뿌린 사람은 진독수(陳獨秀 첸두슈 혹은 천두슈)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를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 소조(小組)운동에 참여했던 그룹들은 1921년 7월 상하이에 모여서 제1차 전국대표대회를 개최하고 중국공산당을 창당하였다고 전해진다.

 

 

모택동은 정강산에서 혁명운동을 위한 조직에 착수했고 마구잡이로 횡포를 부리는 군벌들의 앞잡이와, 부패한 지방관리들과 결탁한 지주 세력에 대항할 실제 군사조직으로 공산당 군대를 창설했던것이다. 

 

1927년 공산당군대를 조직할때 힘을 보탠 사람이 주덕(朱德)이라는 인물이다. 이 군대가 바로 중국대륙 공산화에 절대적인 역할을 했던 홍군으로서 드디어 홍군(紅軍)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주덕은 게릴라전쟁을 수행할 요원을 양성했고 나중에 임표(林彪 린비아오)같은 인물이 홍군에 들어와 전설을 만들어가게 된다. 사진 속의 오른쪽 인물이 한때 모택동의 후계자로 거론되었던 임표이다. 왼쪽 인물은 당연히 모택동이다. 

 

 

 

 

                                          <대장정시 홍군의 탈출로>

 

홍군은 1930년부터 시작된 국민당군의 토벌작전을 이겨내면서 전설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홍군의 실력에 깜짝놀란 장개석의 국민당군은 1933년까지 세차례나 더 공비토벌에 나섰지만 승리하지 못했다. 

 

1931년에 모택동은 정강산 일대를 중심으로 해서 호남성과 강서성의 경계부근에 자리잡은 서금(瑞金)이라는 도시를 수도로 하는 서금소비에트 공화국을 만들기도 했다.  

 

 

이런 사태 진전에 기겁을 한 장개석의 국민당군은 1933년 10월에 70만 대군으로 강서성 중남부지역 전체를 포위하기에 이르렀고 홍군은 포위된채로 식량과 각종 군수물자 및 보급품의 부족에 시달리며 거의 1년을 버텨냈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역사에 전무후무한 대탈출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게 된다. 이른바 대장정(大長征)이라는 것이다. 저 위에 올려둔 지도를 보자. 홍군은 강소성과 호남성의 접경지대에 자리잡은 정강산 일대를 탈출해서 산시라고 표시된 섬서성으로 탈출하려는 것이다.

 

 

그들이 지나가야할 길은 누구나 쉽게 걸어갈 수 있는 평야가 아니었다. 엄청난 강과 계곡과 초원과 눈으로 덮힌 산악지대를 돌파해야만 했다. 단순히 거친 자연만 지나간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일수도 있지만 겹겹이 둘러쳐진 국민당군의 포위망을 뚫고 나가야하는 험난한 탈출이니 더 어려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홍군이 최종 목적지로 삼은 곳은 섬서성 북단 황토고원지대에 자리잡은 연안이라는 도시였다.   

 

 

 

홍군은 소집단으로 부대를 잘게 쪼개어 탈출하면서 호남성, 광서장족자치구, 광동성, 귀주성등을 거쳐 서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는데 귀주성까지 왔을때는 이미 전체병력의 30%이상을 잃었다고 한다.

 

홍군의 주력부대가 양자강을 건너 사천성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했던 장개석군의 전략은 일시적으로 성공하는듯 했지만 결국은 뚫리고 만다. 이 과정에서 대도하(大渡河)의 정교(濾定橋) 전투라는 신화가 만들어진 것이다.

 

사실 내가 이번 여행에서 사천성으로 넘어가서 몇군데 산골 마을을 보기로 원했던 이유가운데 하나는 홍군의 유적지를 살펴보고자 하는 욕망도 있었지만 결국 꿈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홍군은 사천성 서부에서 대설산(大雪山)을 넘었고 마침내 사천성 북부와 청해성 동부, 그리고 섬서성 남부에 걸쳐 있는 대초원지대로 들어선뒤 온갖 고난을 물리치며 통과한 끝에 결국 연안에 도착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이것이 대장정의 대략적인 경과이다.

 

대장정이라는 '고난의 행군'을 통해 모택동은 중국공산당의 신화로 포장된 절대적인 지도자로 올라섰고 이를 바탕으로 해서 항일투쟁에 나서 민심을 얻은 뒤 결국 중국대륙을 지배하는 인물로 우뚝설 수 있었다.

 

 

올해는 중국 공산당 창당 90주년이 되는 해다. 그런 배경을 바탕에 깔고 이런 행사를 주관했을지도 모르겠다. 중국 정부의 의도적인 홍보덕분이었겠지만 홍군의 군가였던 홍가(紅歌)부르기 열풍이 중국 전역을 강타한 끝에 서녕까지 밀어닥쳤던가 보다.

 

 

중국을 이루는 대다수 한족 입장에서 홍가를 부르는게 이해가 되지만 원래부터 청해성의 상당부분은 한족들의 땅이 아니었다. 여기는 장족들의 땅이었다. 남의 땅을 차지하고 자기들의 노래를 부르는 이 뻔뻔스러움을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손에 들고 있는 홍가집(紅歌集)이 보이는가?

 

 

갑자기 불쾌해짐과 동시에 중국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 더 생각해보고 알아봐야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노래를 부르는 이들은 혁명이 벌어지던 당시의 향수에 젖어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봐야 '장정참가'라는 그런 놀라운 경험을 직접 해본 당시 세대의 사람들은 극소수이겠지만 말이다.

 

내가 보기엔 현재의 60대와 70대는 그런 향수에 충분히 젖어들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다. 어쩌면 그들은 젊었던 날에 모택동의 앞잡이 구실을 톡톡히 했던 홍위병(紅衛兵)이 되어 철없는 난동을 부렸던 사람들일수도 있을테니까 말이다.

 

 

뒤에 걸려있는 플래카드를 자세히 보시라. 뭐라고 써두었는가?  "신녕광장 경전 홍가 대가창(新寧廣場 經典 紅歌 大家唱)". 지금 우리가 서있는 이 곳이 바로 신녕광장이다.

 

"어허허허허허허허허허허~~~"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