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한 장소를 두고 어떤 이는 북산사(北山寺)라고 하고 어떤 이는 북선사(北禪사)라고 부르며 또 어떤 사람은 토루관(土樓觀)이라고도 하니 한참동안 헷갈렸다.
그래서 기어이 중국 야후를 방문해서 자료 조사를 해보았다. 방문한 곳의 주소는 다음과 같다.
그랬더니 아래와 같은 설명이 나타났다. 한자에다가 색깔을 입힌 부분을 유심히 보면 위에서 제기한 궁금증은 단번에 해소될 것이고 아울러 대략의 역사도 짐작할 수 있지 싶다.
北山土楼观
北山土楼观面积1平方公里是集佛、道、儒三教合一的宗教场所,始建于公元106年,北魏明帝(公元227~233)时,有僧人在山崖间修凿洞窟,塑佛像,作佛龛藻井绘画,从此土楼观逐渐成为佛教明刹。道家、佛家共住此山,其后,山崖之间被开凿成“九窟十八洞”,供奉佛像,神仙塑像。
1983年经西宁市人民政府批准,将土楼山改名为土楼山,作为道教活动场所。北山土楼观内绿树成荫,鸟语花香,庙堂建筑群错落有致,漫步其中,令人心旷神怡。北山土楼观具有1900年的悠久历史,以其悬空寺的险奇风采和西宁古八景之一“北山烟雨”、依山而凿的“闪佛”、山颠矗立的宁寿塔和“九窟十八洞”的古文化遗存而享誉国内外。
北禅寺(土楼观),位于西宁市北湟水之滨的北山上,俗称“北山寺”。北山因山崖层叠,远眺似土台楼阁高高矗立,故又名土楼山。“北山烟雨”是“西宁八景”之一。
도제천하(道濟天下)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제일 앞 건물은 확실히 도교에 관련된 건물이다. 도제천하라고 했으니 도가 천하를 구할 것이라는 정도의 뜻이 아닐까? 원래는 북선사라고 했던 모양이다. 그러면서 토루관이라는 명칭도 함께 했던 모양인데 일반인들은 그냥 북산에 있는 절이므로 북산사라고 부른것 같다.
절벽 중턱에 붙어있는 구조물이 보이는지 모르겠다. 저런 식으로 건물들이 절벽에 붙어있으니 토루관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왼쪽비석을 자세히 보면 토루관이라는 말이 등장함을 알 수 있다. 누가 토루관을 칭송하여 글을 지은 모양이다.
향을 태우는 냄새가 온사방에 가득했다. 중국의 절이나 도관에서 태우는 향이 크기는 오죽이나 큰가 말이다. 그러니 향 하나를 태우면 연기와 냄새가 함께 진동을 하는듯 했다. 본전 건물 옆으로는 붉디붉은 다알리아가 우리를 맞이해주었다.
절에서 흔히 보는 사천왕상과는 모습이 다르다.
단청이 엄청 화려했다.
건물 안에 모신 상은 부처가 아닌 것이 확실하다. 원시천존(元始天尊)인지 영보천존(永寶天尊)인지 도덕천존(道德天尊) 그도저도 아니라면 옥황상제인지 모른다. 내 실력으로는 도무지 구별이 되지않는다. 신(神)을 잘 늙은 할아버지로 묘사하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우리는 뒤로 돌아갔다. 이제 산 중턱쯤에 자리잡은 또다른 건물을 향해 올라가려는 중이다.
제법 가파른 계단이 우릴 막고 있었다. 저길 올라가야한다는 말이지? 올라가는 것은 분제가 아닌데 내려오는게 조금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햇볕이 나면서 단번에 등어리가 뜨뜻해졌다.
잠시 그늘에 쉬고있는데 우리말이 들려왔다. 잘생긴 중년신사 두분이 내려오고 계셨는데 분명히 우리말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너무 반가워서 말을 걸었다. 알고보니 한분은 선교사였고 한분은 미국에 거주하는 한국인 목사였다.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여기 서녕은 한국인들이 거의 방문하지 않는 곳이라고 하셨다. 우리가 옥수를 가기 위해 표를 끊어놓았다고 했더니 2009년에 엄청난 지진이 나서 도시가 다 무너진 것은 물론이고 지금도 천막생활을 하고 있다고 전해주셨다. 중국인들도 잘 안가는 곳인데 거기를 왜 가려고 하느냐며 신기해하셨다.
헤어질때 선교사님의 전화번호를 받아두었는데 그 분은 두고두고 우리를 도와주시려고 여러가지로 노력을 하셨다. ㅂ선교사님이 이 글을 보실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글을 통해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다.
우리는 가파른 계단을 천천히 올랐다. 땀이 마구 쏟아졌다.
오르다말고 돌아서서 뒤를 보면 우리가 처음 올라온 곳이 까맣게 보일 지경이다. 얼마 안되는 거리같은데 경사가 워낙 급해서 그런가보다. 일단 계단 끝까지 오르기만 하면 그 다음에는 길이 옆으로 나있으므로 따라 걷기만 하면 된다. 옆으로 나 있는 길도 절벽을 따라 만들어져있으므로 한눈팔지 않는 것이 좋다.
조금 걷다가 위를 올려다보니 절벽 위쪽에 구조물이 보였다. 이런 곳을 파서 절이나 도관(道館)을 만들 생각을 한 사람들도 대단한 사람들이다.
느낌으로만 본다면 난주에 있는 병령사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주에 두번이나 들렀으면서도 병령사에는 한번도 가보지 않았으니 할말이 없지만 사진과 동영상으로 본 그곳은 너무나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길 왼쪽으로는 절벽이다. 떨어지면 국물도 없겠다.
절벽 밑으로 난 통로에 서서보면 서녕 시가지가 다 보인다.
위에서 인용한 문장가운데 아래와 같은 부분이 있었다.
“北山烟雨”是“西宁八景”之一。
비가 오는 날 이 절벽에 서서 서녕 시가지를 보면 비구름이나 비안개 속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풍경이 환상적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니 '서녕팔경'중에 하나가 된 것이 아닐까?
인터넷으로 '서녕8경'을 검색을 해보았더니 나오긴 나오는데 모두 한자로만 되어 있었다. 정확하게 번역할 실력이 되지 않기에 소개하는 것을 포기하고 만다.
계단을 오르고 절벽 사이로 난 모퉁이를 몇번 돌았더니 재미있는 그림이 나왔다. 내용으로 보아 지옥도가 틀림없다.
어느 종교나 지옥을 강조하는 것은 모두 다 똑같다. 착하게 선하게 살아가라는 말이겠지만 과연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하는 것일까?
절벽에다가 집을 짓는 기술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게 아닐 것이다.
가파른 절벽을 의지하여 절을 만든 노력도 가상하지만 이런 발상을 한 것 자체가 더 놀랍다는 느낌이 들었다.
제법 많은 사람들이 와서 구경을 했다. 중국인들은 치성을 드리듯이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를 드리기도 했다.
사람이 간신히 지나다닐만한 절벽에다가 아슬아슬하게 건물을 달아낸 이 놀라운 솜씨를 어떻게 표현해야할까?
그래도 있을만한 것은 다 있었다.
유불선의 3가지 색채가 골고루 스며들어 있다고는 하지만 내가 정확하게 구별해내기는 어렵다.
始建于公元106年,北魏明帝(公元227~233)时,有僧人在山崖间修凿洞窟,塑佛像,作佛龛藻井绘画,从此土楼观逐渐成为佛教明刹。道家、佛家共住此山,其后,山崖之间被开凿成“九窟十八洞”,供奉佛像,神仙塑像。
중국 야후에서 검색한 자료를 가지고 판단을 해보면 절의 건축연대는 서기 106년까지 올라가는 모양이다. 1900여년전에 이미 건축을 시작했다는 말이 된다. 북위 명제 시대때는 스님들이 있어서 동굴속에서 도를 닦기도 했던 것 같은데....
북산사 밑으로 지나가는 고속도로의 요금소가 바로 밑에 보인다.
우리는 산꼭대기로 올라가는 것을 포기하고 내려왔다. 이젠 시내로 들어가서 점심을 먹은 뒤 좀 쉬었다가 옥수로 가는 버스를 타러가야만 했기 때문이다.
다시 택시를 타고 신녕광장으로 온 우리는 천천히 걸어서 호텔로 갔다.
신녕광장 정면에는 청해성 박물관이 자리잡고 있다. 박물관 저 멀리 맞은편에는 청해과기관이 버티고 있었다.
백양나무들이 하늘로 치솟아서 그런지 경치에서 서역의 이미지를 느끼게 했다. 오후 3시 10분경에 우리는 서녕 장거리 시외버스 터미널로 이동했다. 아침에 표를 사두었으므로 시간맞추어 터러나가면 된다.
개찰을 하고 나갔더니 우리가 탈 버스가 노란색 침대버스라고 알려준다. 나는 순간적으로 조금 실망을 했다. 옆에 보이는 신형버스가 아니고 구형이었기 때문이다. 우리팀 멤버들은 모여서 표를 골라잡았다. 침대배정을 공평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나는 가운데줄 24번 자리를 고르게 되었다.
버스 앞면에는 서녕에서 옥수로 간다고 한자로 써두었다. 오후 4시 10분발이다. 나중에 보니 버스는 한대만 움직이는게 아니었다. 4시 10분발 버스라고 해서 한대만 달랑 떠나는 것이 아니고 기본적으로 3대 정도가 하나의 그룹을 만들어 한꺼번에 출발하는 것 같았다. 워낙 장거리 운행을 해야하니 함께 다니면서 비상시 상황에 대비한다는 의미도 있겠고 손님들의 수요도 그만큼 많다는 뜻도 되리라.
우리 자리를 찾아가야했다. 일단 큰 배낭은 버스 아래쪽 짐칸에 넣고 작은 배낭을 가지고 올랐다. 밤에 추워질 경우에 대비해서 소매가 긴 겉옷을 하나 따로 챙겼다.
이 사진을 보면 침대버스 분위기가 이해되지 싶다. 내 자리는 2층이다. 버스 안에는 석줄로 침대가 배치되어 있는 것이다.
앞사람 머리 밑으로 내 발이 들어가게 되어 있다. 침대버스! 참으로 신기한 존재가 아니던가? 한사람이 차지할 수 있는 공간은 워낙 좁아서 눕기만 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마음대로 돌아눕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버스에 오를때는 신발을 벗어서 비닐 봉지에 넣어야 한다. 그 신발은 자기가 알아서 보관해야 하는데 신형버스일 경우 신발 넣는 곳이 자기 머리두는 곳 바로 밑에 마련되어 있기도 했다. 일단 내 짐을 정리해두고 버스가 출발하기를 기다렸다. 이제 우리는 옥수를 향해 가는 것이다. 옥수라는 곳으로 말이다.
어리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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