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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살이/옛날의 금잔디 Long Long Ago (고향)

할머니를 그리며

by 깜쌤 2006. 9. 24.

 

오늘은 집안 이야기를 꺼내본다. 집안 이야기라고 하는게 원래 좋은 일만 이야기하고 싶은게 아니던가? 우리 집안이야 크게 내세울 것도 없는 그저 그런 고만고만한 집안이므로 자랑할 만한 건덕지는 눈닦고 찾아보아도 없다.

 

호적을 보면 아버지가 1925년생이니 올해 만으로 쳐도 81세가 된다. 그런데 2년 늦게 출생신고를 하셨다고 하니 만 83세가 되고 우리 한국나이로 친다면 여든넷 혹은 여든 다섯이나 된다.

 

호적 기록만 가지고 조사를 해보면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 1932년이니 아버지 나이 일곱 여덟살때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셈이 된다. 넉넉하게 잡아도 할머니는 결혼하신지 십년도 안되어서 남편을 잃어버린 그런 분이 되는 셈이다.

 

흔히 세상사람들이 쉽게 말하는 청상과부가 되셨던게다. 나는 삼촌 얼굴보차 본적이 없는데 누님의 말에 의하면 삼촌 얼굴이 기억난다고 하니 그렇다면 할머니는 남편없이 힘들게 사시며 아들 형제를 어렵게 키워내신 것이다. 일제 강점기 시절의 이야기니 기막힌 일생을 살았다고 하는 것은 안봐도 뻔한 일이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집에는 훈장 하나가 있었다. 아마 삼촌이 받으셨던 것인 모양인데 삼촌은 625전쟁 때 입은 부상의 여파로 결혼하지도 못하고 돌아가셨으니 피붙이 하나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므로써 할머니 가슴에 못을 박고 돌아가신 셈이 되었다.

 

예전에는 결혼하지도 못하고 죽은 사람들은 무덤조차 변변하게 써주지 않았었다. 형편이 그러니 삼촌은 변변한 무덤조차 하나 남기지 않으셨다. 벌초를 가면 아버지께서는 제일 마지막에 혼자만 아시는 한군데를 꼭 다녀오셨다.

 

같이 따라가려고 하면 그런데는 안가봐도 된다면서 혼자 다녀 오시기를 원하신 적이 많았다. 어떤 해는 미리 그곳만 벌초를 해두고 술한잔 부어놓고 오셨다고 했다.

 

그런 할머니조차 내가 초등학교 5학년때 돌아가셨으니 내 기억에 남은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한 3년 동안의 삶 뿐인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유일한 혈육이셨던 할머니! 나는 할아버지도 뵌적이 없고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도 얼굴 한번 뵌적이 없다.

 

고모, 이모도 없었으니 고종사촌 이종사촌은 있을수가 없었다. 삼촌이 그런 모습으로 돌아가셨으니 사촌은 없는게 당연했다. 그러니 명절엔 우리 가족만 달랑 모였다. 가족이 다 모여 성묘를 가고 제사를 지내는 모습이 너무 신기하기만 했고 문중이야기나 문중 재산 이야기가 나오면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았다. 

 

할머니는 나에게 한번도 할아버지나 삼촌 이야기를 하신 적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열살 전후의 어린 맏손자녀석을 데리고 무슨 인생사 이야기를 하실 형편이 되셨으랴?

 

하기사 여름 방학때만 잠시 와서 머물다 갔으니 이야기 하실 시간도 없으셨겠지만 오늘 따라 이렇게 그리워지는 것은 이제 나도 나이가 들었기 때문이리라.

 

1964년 4학년 여름방학때 할머니 댁에 가서 한달을 지내다가 왔었다. 당시 내가 살던 곳에서 할머니가 계셨던 군위군 군위면까지는 기차로 세시간 걸리는 거리에다가 다시 버스를 타고 더 들어가야했으니 멀다면 먼 거리였다.

 

나를 거기에 데려다 놓으시고 어머니께서는 곧 삶의 터전으로 돌아가셨으므로 여름 방학 내내 줄창 할머니와 단 둘이서만 지내야했다. 할머니는 새끼 손가락이 펴지지 않고 굽어 있었다. 그게 오른손인지 왼손인지는 이제 기억도 가물가물하지만 유독 그 손가락만이 조금 오무라져서 펴지지 않으셨는데 조기 가시에 찔려서 그렇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셨던 기억만은 생생하다.

 

그해 여름 할머니는 나를 혼자 남겨두시고 왕복 삼십리길이 되는 군위장에 다녀오셨다. 하루 종일 동구 밖 느티나무 앞에 몇번이고 나가서 할머니를 기다렸던 기억이 아삼삼한데 할머니께서는 어린 맏손자인 나를 위해 고동색 골덴 추석빔을 마련해 오셨던 것이다. 그때는 골덴이라는 말이 낯설어서 고리땡이라고 불렀다.

 

오늘따라 그 옷이 그리운 까닭은 이제 한 열흘 남짓 있으면  추석이 되기 때문이리라. 23일 토요일 성묘를 마치고는 디카를 들고 할머니께서 사셨던 집에 찾아가 보았다.

 

집터는 맞지 싶은데 낯선 전원주택이 자리를 잡았고 할머니의 체취를 느낄만한 흔적은 그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꼬부랑 논길이었던 군위장 가는 길은 이제 자동차가 다닐 수 있도록 변해 있었는데 금방이라도 저기 저 쯤에서 할머니가 나타나실 것만 같아 한참을 서 있었다.

 

       

 

 

나는 혼자 위천(威川)에를 많이 갔었다. 여긴 아직도 물이 맑은 곳이지만 그 많았던 자갈은 골재채취로 인해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아는 친구가 없었으니 무료할때면 그저 혼자 위천에 나가 멱을 감았다.

 

발 뒤꿈치를 들고 강물이 목에 찰랑거리는 지점까지 들어갔다가 돌아서 나오곤 했는데 지금 생각해도 아슬아슬했던 적이 많았다. 물속에 가만히 서 있으면 기름종개 같은 녀석들이 발밑을 간지르기도 했고 작은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내 몸을 찝쩍거리기도 했다. 그때의 감촉은 아직도 생생한데 할머니 얼굴 모습은 생각나지 않으니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5학년 여름방학때 할머니는 손자 손녀를 바래다 주기 위해 우보역까지 따라 오셨다. 버스 시간을 몰라 30리길을 걸어서 왔는데 할머니께서는 기차를 타는 우리를 저쪽 붉은색 벽돌 건물 부근에 쌓아둔 기름먹인 침목 뒤에 숨어서 살펴보셨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해 겨울 할머니께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할머니께서는 다시 30리 길을 걸어서 댁으로 돌아가셨으리라. 참 많은 세월이 흘렀다. 이젠 내가 그때 할머니처럼 머리카락이 희게 변했다. 세월이 가고 사람도 갔다. 사람살이라는게 그런 것인가 보다.

 

 

어리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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