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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05 유럽 남동부-지중해,흑해까지(完)

터키 앙카라 5

by 깜쌤 2006. 6. 17.

1915년 세계 제 1차대전의 와중에서 영국 프랑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의 연합군은 터키의 겔리볼루(=갈리폴리)에 상륙한다. 병이 들대로 든 오스만 터키 제국군대와 일전을 벌여 제국의 숨통을 끊기 위해서였다.

 

물론 잘 아시다시피 터키와 독일, 오스트리아가 손을 맞잡은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영국 해군본부 위원이었던 윈스턴 처칠의 지휘아래 이루어진 이 작전은 곧 터키군의 격렬한 저항을 받게 되고 역사적인 비극으로 발전한다.

 

1차 대전에 등장한 신무기는 탱크다. 독일의 입장에서 본 유럽의 서부전선에서는 철조망으로 중무장한 참호를 중심으로 땅을 뺐기 위한 참호전이 지루하게 이어졌고 이를 타개하기 위한 고육책으로 탱크가 등장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총알을 피하기 위해 포복이 시작되었고 이는 곧 군복의 변화를 불러 일으켰다. 기관총이 본격적으로 배치되기 시작했는가 하면 독가스가 살포되었다.드디어는 전투 비행기까지 등장했다.

 

갈리폴리에서는 좁은 해변 절벽을 뒤로하고 참호전이 전개되었는데 해안으로 배수진을 친 연합군의 희생자가 극에 달했다. 무모한 돌격명령으로 인해 수많은 젊은이들이 용감하게 참호를 기어올라 앞으로 달려나갔고 결국은 터키군 기관총알의 밥이 되고 만 것이다.  

 

    

터키군 방어 사령관은 무스타파 케말 파샤 대령이었다. 1차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터키가 거둔 유일한 승리가 아마 갈리폴리 전투일 것이다. 연합군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거대한 희생을 안겨주었고 전투는 패배로 끝났다.

 

처칠의 개인 이력 속에서 이 사건은 심각한 불명예스러운 일로 기록된 것은 물론이다. 오늘날 갈리폴리에는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의 수많은 젊은이들로 가득하다. 관광명소가 된 것이다.

 

당연히 터키쪽에서는 자랑스러운 승전기념장이 되어 애국 교육을 시키는 훌륭한 교육장으로 개발해두었다. 케말 파샤는 영웅이 되었고 나중에 그는 공화국 터키의 초대 대통령이 되어 국부로 존경받고 있는 것이다.

 

터키에서 무스타파 케말 파샤는 보통 아타투르크로 불린다. 그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거의 절대적이어서 어찌보면 우상 숭배에 가깝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들은 아타투르크 기념관으로 가는 중이다.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위 사진을 보면 숲속에 자리잡고 있는 황금색 사각형 건물이 보이는데 바로 그 건물이 기념관인 것이다. 여긴 벌써 성역화되었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입구는 두군데가 있다. 어느쪽으로 입장하든지 간에 입구에서는 소지품에 대한 검색이 이루어진다. 카메라와 간단한 음료수는 소지해도 되지만 작은 배낭 정도는 맡겨야 한다.

 

 

그런 뒤 엄숙한 마음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우리야 그런 마음이 별로 생기지도 않지만 터키인들의 자세와 눈빛은 달라진다.

 

 

아카라 시내를 굽어볼 수 있는 언덕 위에 세워진 초대형 기념관 겸 묘소인데 건물이 주는 웅장함도 대단한 곳이다.

 

 

 

 

 

황금색이 반듯한 건물이 전체를 에워싸고 있어서 단순함 속에 절제미를 보여주는 특이한 장소이다.

 

 

 

무덤이 있는 황금색 건물과 회랑이 있는 입구로 올라서면 맞은편에서 올라오는 입구가 보인다. 사진의 끝에 서서 보면 구시가지가 보인다. 엎드려 있는 돌사자들은 그리스 낙소스 섬의 유적을 연상시킨다.

   

 

 

군더더기 장식이 없는 반듯한 사각형 건물이 우리를 반겨 주었다.

 

 

 

사람 키 크기와 비교해보면 건물의 크기를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위병들은 절도 있는 동작으로 교대를 한다. 터키 각군들 복장으로 여기저기 서 있다.

 

 

 

 

 

 

이곳에서 보면 앙카라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빌딩들이 있는 저곳이 터키 수도 앙카라의 중심부이다.

 

 

 

바로 이 건물 속에 아타투르크(=타키 국부 國父)의 무덤이 있다. 무스타파 케말 파샤는 1922년 그리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1923년 10월에 터키 공화국을 건국을 선포하고, 수도를 앙카라로 정한다.

 

이런 업적을 남긴 무스타파 케말 파샤에게 국회가 준 칭호가 아타 투르크인 것이다. 터키를 방문해보면 단번에 느끼는 인상이지만 아타투르크는 터키인들에게 신적인 존재이다.

 

아타투르크와 관련된 것들을 모욕하거나 욕하면 곤란해진다. 그런 행위 자체가 법으로 금지되어 있으므로 잘못하면 처벌의 대상이 된다. 

 

 

 

 

아타투르크'는 1938년 11월 19일 이스탄불의 보스포러스 해협에 자리잡은 아름다운 궁전 돌마바흐체에서 사망한다. 그는 처음에는 앙카라 민속박물관에 안치되어 있다가  1953년 11월 10일 현재의 이 기념관, 일명 아늣트 카비르(Anit Kabir)가 완공된 후 이곳으로 이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이 곳 Anit Kabir는 어제 우리가 둘러 본 앙카라 성, 이야기를 꺼내다 만 아나톨리아 박물관과 함께 꼭 방문해야 할 명소가 되어 버렸다. 회랑 지하에 아타투르크 박물관이 있으므로 둘러보면 좋을 것이다. 아타투르크가 터키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될 것이므로.... 

 

 

 

어찌보면 우리는 영웅을 만들어 낼 줄 모르는 사람들이다. 영웅이 없는 국가는 흠모해야할 대상이 없으므로 교육적으로도 그다지 바람직한 현상은 아닐 것이다.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승만 대통령은 부정선거와 독재때문에 하야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지긋지긋한 가난을 없애고 경제개발을 선도한 어떤 대통령도 지금은 욕을 무더기로 얻어먹는 세상이다. 나는 앞에 말한 누구 편도 들지 않는 사람이지만 국가나 집안에 어른이 없다는 것은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민족은 대가 드센 편이라고 본다. 그러기에 독불장군도 많고 역사조차도 자기감정과 주관을 개입시켜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는가 하면 지역감정에 근거하여 묻지마 투표를 하는 등 감정적인 면이 많은 편이 아닌가 한다.

 

좋게 말하면 감성적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격한 감정에 쉽게 치우친다는 느낌을 받는다. 자, 그건 그렇고 하여튼 우리에게는 언제쯤 되어서야 케말 파샤 같은 영웅이 등장하는 것일까?

 

     

 

앙카라 외곽지역의 모습도 여기에 서면 한눈에 다 보인다.

 

 

 

회랑의 모습에도 간결미가 넘친다.

 

 

 

 

 

 

 

 

 

우리들은 엄숙한 마음으로 아타투르크의 묘소를 찾아갔다.

 

 

 

올라가는 벽면에 새겨진 부조의 모습이다. 마치 이란의 고적도시 시라즈 부근에 있는 페르세폴리스의 벽면 조각같다. 이집트 냄새도 나는 것 같고.....

 

 

 

한무리의 유치원 아이들이 참베를 마치고 내려오고 있었다.

 

 

 

 

지하에 마련된 박물관에 들어가면 아타투르크가 쓰던 온갖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다. 사진 촬영은 금지하므로 소개할 수 없는 것이 유감이다. 마지막 출구 부근에 오면 낯익은 사진이 보인다. 누구 같은가?

 

 

 

 

 

어리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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