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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05 유럽 남동부-지중해,흑해까지(完)

터키 헤매기 25 - 에베소 6

by 깜쌤 2006. 4. 30.

이번엔 술라 손자의 무덤이 나타났다. 시오노 나나미 여사가 쓴 <로마인 이야기>를 보면 술라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가 언급된다.

 

 

 

 

 

 

 

 

 

 

 

 

 

거대한 대리석 기둥의 도시 에베소는 이런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게 살아있는 실제의 도시라면 그 화려함이나 웅대함은 말로 설명할 수가 없을 것 같다.

 

 

 

큐레테스 거리를 내려오던 우리는 헤라클레스 문을 지나 왔다. 기원후 4세기 시대의 건축물로 알려져 있는데 두개의 기둥에 헤라클레스(=허큘리스)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고 해서 더욱 더 유명해진 것이다.

 

 

 

이 양반이 그 유명한 천하장사인가 싶다. 헤라클레스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영웅 중의 영웅이 아니던가? 그가 겪은 열두가지의 유명한 노역 가운데 네메아의 사자를 죽이고 나서 그 사자 가죽을 옷처럼 걸치고 다녔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아르카디아의 잡기 힘든 사슴을 잡기도 하고 에리만토스 산의 멧돼지를 잡기도 했으며 아우게이아스의 외양간을 단 하루 만에 청소하기도 했다는 양반이다.

 

그런가 하면 크레타 섬에 가서는 섬주민을 공포에 떨게 했던 미친 소를 잡기도 했으니 가히 천하장사라 할만하다. 그는 주로 곤봉을 썼다고 전해진다.

 

 

 

 

 

자세히 보면 사자 가죽을 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계속 큐레테스 거리를 따라 셀수스(=켈수스) 도서관 가는 길로 내려 간다. 하지만 이 길을 따라 그냥 막 내려가면 중요한 유적을 거의 다 놓치고 말게 되므로 천천히 하나하나 살피면서 내려가야만 하는 것이다.

 

안그러면 언제 또 와서 본단 말인가? 한번 오기도 힘든데 몇번씩 와서 본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그런데 나는 여길 세번씩이나 왔으니 정말 복받은 사람이 맞긴 맞지 싶다. 그런데도 에베소 유적에 대해 잘 기억이 나지 않으니 이 못말리는 건망증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다. 

 

 

 

헤라클레스 문기둥을 조금 떨어져서 본 모습이다.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여긴 그늘이 거의 없다. 그러므로 양산을 준비하는 것도 좋은 생각이다. 양산이 없으면 모자라도 꼭 챙겨가기 바란다. 

 

 

 

이제 저 밑에 그 유명한 켈수스 도서관이 등장한다. 이 도서관만은 세상없어도 보고 가야 한다. 거듭 이야기하지만 이 위치에서도 그냥 홀랑 내려가면 안된다. 아직도 살필게 많다. 그러길래 에베소 아닌가?

 

  

 

사람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려서 헤라클레스 문을 다시한번 더 살펴보았다. 관광객들이 워낙 많이 몰려오므로 사람없는 장면을 잡는다는 것 자체가 힘들다.

 

 

 

헬라어와 라틴어가 새겨진 돌들이다. 이땐 라틴어를 모르는 것이 한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헬라어를 아는 것도 아니니 큰일이다. 하여튼 서기 1세기의 국제어는 라틴어와 헬라어였으므로 두개의 말이 이런 식으로 나란히 새겨져 있는 것이다. 

 

 

 

이건 "트라야누스 샘"이라는 건물터의 흔적이다. 서기 98년부터 서기 117년까지 로마제국의 황제로 있었던 양반이 트라야누스이다. 건물 조각이 화려하다.

 

 

 

곳곳에 도시의 흔적이니 세세히 살펴보려면 시간가는 줄 모른다. 우리나라에서는 로마사를 그냥 슬쩍 핥고 지나가지만 서양 아이들은 그렇게 배우지 않는다. 서양인들은 아주 유심히 살펴보는 것 같았다. 하기사 우리와 트라야누스가 무슨 상관이 있으랴?

 

 

 

조금 더 내려온 우리들은 내려가면서 왼쪽 편에 있는 부자들의 저택과 상점들이 즐비하게 자리잡았던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쪽으로는 골목 바닥에 기막힌 모자이크 작품들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막 내려가면 안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길바닥을 장식한 이 화려한 모자이크를 살펴보시기 바란다. 타일을 가지고 만든 것이다. 어떤 재질을 사용했길래 수천년의 세월을 이겨내고 바닥에 찰싹 달라 붙어있는지 심히 궁금해진다.

 

 

 

무늬의 아름다움은 또 어떻고.......

 

 

 

물을 살짝 부어서 색깔이 드러나게 해보았다. 이게 정녕 이천년전의 인간들이 살던 도시란 말인가? 그런데 왜 우리나라에는 이런 유적이 안남아 있는 것일까?

 

 

 

스콜라스티카 목욕장 입구에는 얼굴이 없는 여성상이 하나 서 있다. 이 목욕장은 기원후 1세기 정도에 처음으로 지어진 건물을 4세기에 부유한 여성 자선가인 스콜라스티치아(Skolasticia, Scholasticia, 스콜라스티카 Scholastica)가 돈을 내어 3층 건물로 확장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런 기막힌 조각 솜씨는 어떻게 습득한 것일까?

 

 

 

여긴 스콜라스티카 목욕탕이다.

 

 

로마인들의 목욕 문화가 유명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천년전에 이런 시설을 갖추어두고 사용할 줄 알았다는 것은 믿어지지 않는 일이다.

 

 

 

폼페이의 목욕탕 시설과 견주어봐도 크게 뒤떨어진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바닥을 잘보면 구운 토관을 이용해서 배수와 급수를 했음을 알수 있다. 사실 부근을 잘 살펴보면 발굴해서 쌓아둔 토관들이 수북함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로마인들은 냉탕, 열탕에다가 사우나까지 즐기고 살았다니 어안이 벙벙해진다.

 

 

 

믿어지지 않는 일이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