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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05 유럽 남동부-지중해,흑해까지(完)

아름다운 해안 아말피로 가자!! 3 - 폼페이의 최후

by 깜쌤 2005. 10. 19.

1709년이라면 우리나라에선 이제 병자호란의 충격에서 회복되어 실학자들이 등장하고 농업과 상업이 기지개를 켜던 그런 시기이다. 그 해에 이탈리아에선 베수비오스 산 서쪽에 자리 잡은 레지나 마을의 수도원 뜰에서 우물을 파던 일꾼이 대리석 조각을 찾아내었지만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럼으로써 폼페이가 좀 더 일찍 발굴될 수 있는 최초의 기회를 날려버렸다. 

 

 세월이 흘러 1738년 4월, 이번에는 어떤 농부가 베수비오 화산 기슭에서 밭을 갈다가 긴 쇠붙이를 찾아낸다. 나중에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토목기사들은 그것이 아주 먼 옛날 로마제국 시대에 쓰인 수도관임을 한눈에 알아보고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이 땅 밑엔 뭔가가 묻혀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보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이탈리아는 통일 왕국이 아닌 분열왕국의 시대였다. 나폴리 지방을 다스리던 왕의  왕비 크리스티네가 이 소식을 듣고 왕실 공병부대 지휘관인 알쿠비에르를 시켜 유물이 발견된 산기슭을 파헤쳐보도록 했다고 한다. 그게  폼페이 발굴의 역사적인 첫걸음이었던 모양이다. 


알쿠비에르가 지휘하는 팀은 청동 조각품 몇 개를 찾아냈고 마침내 그해 12월11일에는 ‘헤르쿨레니움 극장’이라고 새겨진 돌을 발견함으로써 드디어 폼페이에 대한 단서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할 때  묻어버린 도시는 폼페이뿐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대한 대한 증거를 찾아낸 것이다. 함께 묻혀버린 그 도시는 헤르클레니움이다. 

 

 


1748년 4월1일, 나폴리 왕 샤를르의 명령을 받은 알쿠비에르는 베수비오 화산 기슭의 또 다른 곳을 파헤치기 시작했고 마침내 프레스코 벽화가 그려진 돌 벽을 찾아낸다. 4월19일에는 청동제 조각들을 찾아내었고 드디어 화석화 된 사람의 주검이 발굴되었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금화를 움켜쥔 채 죽은 남자가 발견됨으로써 이 지역은 세인들의 비상한 관심을 끌게 되었지만 더 이상의 유물이 나오지 않자 발굴 열기도 시들해지고 만 것이다.

 

궁금하시다면 시오노 나나미 여사가 쓴 로마인 이야기 제 8권 “위기와 극복”편의 312쪽부터 자세히 읽어보시기 바란다. 비극적인 사건의 전말이 실제 현장을 목격한 역사학자의 편지글 전문 속에 아주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 편지글을 지금부터 약 250년 전에 읽어 보다가 나폴리에서 발굴한다는 그 장소가 바로 폼페이일 것이라고 짐작한 사람이 바로 최초의 고고학자라고 불리는 독일 출신의 요한 빙켈만이다. 그는 1755년 6월 어느 날 자기 서재에서 ‘소(小) 플리니우스 서간집’을 읽어보다가 나폴리 국왕이 발굴한다는 그 유적지가 바로 폼페이임을 눈치 챈 것이다.

 

 

 


이 편지글 속에는 소 플리니우스가 외삼촌이 되는 대(大) 플리니우스의 죽음 과정을 자세히 묘사해 놓고 있었다. 대 플리니우스는 배를 타고 폼페이 시민들을 구하러 가서 죽었던 것이다.


소 플리니우스가 “역사”를 쓴 타키투스에게 보낸 편지글에 의하면 베수비오 화산은 서기 79년 8월24일 오후 1시를 전후해서 폭발을 시작한 모양이다. 로마 시민들의 여름철 휴양 도시인 폼페이는  나폴리로부터 12㎞ 떨어진 베수비오산 기슭에 세워진 화려한 도시였지만 폭발로 인해 도시 하나가 모조리 묻혀버리고 마는 비극을 겪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