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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깜쌤의 세상사는 이야기 : '난 젊어봤다' - 자유 배낭여행, 교육, 휘게 hygge, 믿음, 그리고 Cogito, Facio ergo s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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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04 중국-운남,광서:소수민족의 고향(完)

● 샹그릴라를 찾아서 - (2)

by 깜쌤 2005. 9. 22.


차창 밖으론 계림을 닮은 경치가 연달아 펼쳐진다. 작은 행복감에 젖어 열심히 창 밖을 응시하던 나는 어느 사이에 살짝 잠이 들고 말았다. 눈을 떠보니 기차는 류주(柳州 류조우)역을 벗어나고 있었다. 어느덧 오전 11시 반을 넘어선 것이다.

 

이젠 아침이라도 먹어야 한다싶었는데 두 분이 붉은 토기에 담긴 도시락을 구해 오셨다. 세상에 살다가살다가 토기에 밥을 담아 도시락으로 파는 것은 여기에서 처음 보았다. 투박한 질감이 묻어나는 토기에 담긴 밥이 조금 덜 익었다는 단점을 빼고는 그럭저럭 먹을 만했다.


 류주를 지난 기차가 어디로 가느냐가 관심사였는데 다음 기차역을 확인해보니 일주일전에 우리가 왔던 선로를 따라 가는 것은 확실히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 기차는 남녕을 거쳐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계림에서 일단 남서쪽으로 달린 뒤 남녕까지 가서는 방향을 틀어 서북쪽으로 올라간다는 말이 되는 거다.

 


 어느덧 차창 밖의 경치는 일변하여 아열대 지방 특유의 붉은 벌판이 나타나고 있었다. 끝없는 논이 계속되니 슬금슬금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월남(베트남)으로 가기 위한 경유지로도 널리 알려져 있는 남녕역까지 가는 동안 우리 칸의 침대자리 하나가 비워져 있어서 이젠 아무도 타지 않는가 보다 싶었는데 남녕에서 우리 침대 칸에 들어온 아가씨가 있었다.

 

어떤 노신사가 차내에까지 짐을 들어다 주고 작별인사를 하고 내려갔는데 얼른 들으니 '파파 어쩌고 저쩌고' 하는 것으로 보아 부녀간(父女間)이라고 짐작했다.  우리 일행을 쳐다보던 그녀와 늙은 노신사 얼굴엔 까닭 모를 근심이 스치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한참동안 뽀시락거리며 짐을 정리하고 난 뒤 이층 침대에 앉아 부지런히 전화를 하던 그녀의 이야기 속에 '한꿔런(韓國人)'이라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자기 아버지와 통화를 하는 모양이다.


 우리가 아래층에서 하는 이야기를 들은 그녀가 외국인임을 눈치채고 한국인이라고 넘겨짚은 모양이었다. 지겨워지기 시작한 우리들이 한참이나 졸고 자고 하기를 반복하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저녁 7시 반경이 되었다. 기차는 백색(白色)역을 통과하고 있다. 귀에 익은 노래 소리가 나는 것 같아 귀를 기울여보니 국민가수 조용필씨의 "친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우리 가요를 들으니 감회가 새롭다. 이럴 땐 따라 불러야 제격이다. 위층의 아가씨가 경계심을 풀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나쁜 사람들이 아님을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창 밖만을 응시하며 새침하게 앉아있던 그녀와 친해진 것은 기차가 백색역을 지나고 난 뒤였다.


 라면으로 저녁을 때우기 위해 끓는 물을 가지고 와서 컵 라면에 부은 뒤 익기를 기다리다가 그녀에게 이야기를 붙여보았다.

 


 "자오지에! 니 중꿔런(아가씨, 중국인이오)?"
 "니먼 한꿔런마(당신들은 한국인입니까)?"
 "되(예)! Can you speak English?"
 "No."


 그렇다면 이젠 필담을 해야 한다. 영어를 못한다니까 글씨를 써가며 대화를 해야 하는 것이다. 곤명까지 간다는 이 아가씨는 지나가는 차장에게 물어 도착시간을 가르쳐 준다. 내일 아침 7시전에는 곤명에 도착한다고 한다. 7시라면 약 24시간만에 도착한다는 이야기가 되니 올 때보다 훨씬 시간이 적게 걸린다는 말이 아닌가?


 "아니, 그렇다면 우린 엄청난 행운아일세 그려..... 어허허허! 이런 복이 다 있나? 아 글쎄, 시간 적게 걸려, 연와 침대여서 한없이 편해..... 이게 무슨 복이야? 우와, 살판났네."


 어린아이들처럼 즐거워하며 유쾌하게 저녁을 먹은 우리들은 늘어지게 자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