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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생 - 그리 허무한게 아니었어요. 살만했어요
우리나라 안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나라안 여기저기 in Korea

신돌석 장군 생가

by 깜쌤 2019. 9. 9.

2019년 올해, 들어보았던 말이나 읽어보았던 문장가운데 가장 감명깊었던 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표현이었습니다.


"독립운동은 못했지만 불매운동에는 참여한다"


옳은 말입니다.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9월 2일 영덕을 다녀왔습니다. 내려오는 길에 꼭 한군데 들러야 할 곳이 있었습니다. 남의 승용차에 편승해 갔으니 기사에게 부탁해서 꼭 가고 싶었던 그곳에 들러보았습니다.



신돌석 장군 생가입니다. 경북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에 그의 생가가 있는데요, 7번 국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1995년에 그 분의 생가가 복원되었다고 합니다. 신돌석 장군은 1905년의 을사늑약에 항거하여 분연히 일어나 의병 지휘관으로서 큰 명성을 날렸습니다.



도곡리는 영덕군 영해읍 약간 못미친 곳에 있습니다. 영해시장은 만세시장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영해지방은 삼일독립만세운동 때도 앞장서서 거사를 했던 충절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생가는 네칸 집입니다. 1878년 11월생으로 알려져 있는데 신돌석 장군은 을미사변때도 열여덟살의 나이로 의병활동에 뛰어들었다고 하니 기개와 기상이 남달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장군은 평민 의병장이었다는데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 분의 활약도 대단했지만 평민으로서 의병활동에 뛰어들어 구국활동에 나서서 지도력을 발휘했으니 그릇이 남달랐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신돌석 장군의 사망은 참으로 비극적이었습니다. 장군에게 걸린 엄청난 현상금에 눈이 어두웠던 친척들이 도끼로 살해했다는 것이 정설로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현상금을 건 것은 왜놈들이었고요.



서른살의 꽃다운 나이에 혈연이 파놓은 간계에 걸려 목숨을 잃었으니 그 억울함과 애달픔은 한이 없을듯 합니다.



 생가 한쪽에는 장군의 빼어난 용력에 관련된 도구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왜인들이 우리를 그렇게 없신여기고 잘난 척해도 아직도 일제라면 사족을 못쓰는 사람들이 많으니 신돌석 장군이 살아서 돌아오신다면 우리들을 준엄하게 꾸중하실 것만 같습니다.



나는 평생을 두고 극일주의자로 살았다고 자부합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면서도 일본에게만은 어떤 일이 있어도 이겨보자는 이야기를 자주 했습니다. 극히 일부이긴하지만 지역감정에 휘둘리는 자들이 경상도 사람들 전체를 토착왜구로 몰아가는 것에 대해 극심한 분노를 금할 길이 없습니다. 



 

반일은 감정적인 대응이지만 극일은 이성적인 접근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반일도 나름대로 가치가 있겠지만 이번에 왜국이 제기한 분쟁으로 촉발된 사건들을 계기로 일본에게만은 반드시 이겨내는 수준높은 극일로 가야할 것입니다. 우리가 극일에 성공하면 세계 최일류 국가가 될 게 틀림없습니다. 



대청마루에 걸린 태극기를 보는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이번만은 왜인들이 굴복하는 그날까지 불매운동을 계속하십시다.  



생가 위치는 지도에 표시해두겠습니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