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이 언덕 위에서 봐야할 것으로서 놓친 것은 부다 왕궁정도라는 생각이 들었어.
왕궁쪽으로 걸어가다가 도나우강 반대편 경치를 살펴보기로 했어.
이리저리 사방을 살피며 천천히 걸었어.
주정부청사 부근에서는 위병교대식이 이루어지고 있었어.
위병들의 절도있는 걸음걸이가 이어지자 관광객들이 순식간에 몰려드는거야.
모두들 잔디밭에 들어가서 마구 셔터를 눌러대던데, 난 그러질 않았어. 내가 뭐 고상하게 잘났다는 말이 아니고 나는 선천적으로 그런 짓을 잘 못해.
부다 왕궁 앞을 걸었어.
왕궁이 이젠 단순한 왕궁이 아니고 5백만권의 도서를 소장하고 있는 국립도서관으로, 국립 갤러리로, 부다페스트 역사박물관으로, 현대역사박물관으로 용도 변경되어 쓰이고 있다는거야. 그렇다면 반드시 들어가봐야할 명소가 된 셈인데 시간에 쫒긴 우리는 그런 기회를 잡을 수가 없었던거야.
그런걸 보면 나는 삼류 양아치정도에 지나지 않는 풋내기 인생임이 틀림없어. 자기 비하가 아니라 사실이 그렇다는거야.
경치구경에만 눈이 멀어버린 따라지 인생이지.
강변에 그늘이 지고 있었어.
서둘러서 왕궁 건물이라도 훑어야했어.
일행을 남겨두고 다른 한분과 함께 왕궁 후면을 보러 갔어.
짧은 내 생각으로는 도나우 강을 마주한 곳을 전면이라고 여긴거지.
도나우강을 굽어보고 있는 이분은 누구였을까?
성벽을 따라 걸으며 여기저기 눈길 닿는곳마다 시선을 보냈어.
계단을 내려가서 쪽문을 지나쳤더니 옆 정원으로 이어지더라고.
벨러4세라는 왕이 부다에 처음으로 성을 건설했다고 전해지는데 그 자세한 위치는 모른다는 거야.
그러다가 15세기 초반에 고딕양식의 궁전이 이 부근 어딘가에 들어섰다는거지.
1458년에는 마차시왕에 의해 르네상스 양식으로 바뀌었다고해.
오스만 투르크라는 이름은 들어보았지? 오늘날 터키의 전신이 된 나라야.
오스만 투르크가 헝가리를 지배한 적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있지? 오스만 투르크의 군대가 오늘날 오스트리아의 수도인 비엔나부근까지 쳐들어간 적이 있었지.
오스만제국은 헝가리를 점령한 뒤 이 왕궁을 마구간과 화약보관소로 용도변경하여 사용하기도 했었어.
그리스가 자랑하는 세계문화유산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속에 화약을 저장했던 사람들이 오스만 투르크 제국 군대였어.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우상파괴라는 거창한 명분을 내걸고 바미안의 대석불을 파괴한게 서기 2000년의 일이었던가 그렇지.
지하드(=성전 聖戰)라는 명분으로 자살폭탄테러를 저지르는 사람들 눈에 문화유산이라는 낱말이 보이기나 할까싶어. 하기사 옛날에는 세계문화유산이니 뭐니하는 그런 말이 없었지.
세체니 다리를 볼때마다 이젠 마음이 아파.
내가 갔을땐 유람선 사고가 나기 직전이었지만 마음이 아픈 건 어쩔 수가 없어.
여섯살 먹은 꼬맹이 소녀의 죽음은 정말이지 너무나 가슴 아프게 만들었어. 강바닥에 가라앉은 배를 끌어올리자 선실 속에서 외할머니 품에 안긴채로 주검이 발견되었다고 했었지?
부다왕궁을 내려온 우리들은 세체니 다리를 건넜어.
강물은 그날도 유장하게 흐르고 있었는데 말이야.
그런데, 가만! 도나우 강에 떠있는 이 배 이름을 자세히 봐둬. 바이킹 시긴 아니야? 유람선 침몰사건에서 가해자였던 바로 그 배야. 이 배가 사고를 낸거야. 이런 거대한 배가 자그마한 유람선을 추돌한거지.
우연히 찍어둔 사진에 찍힌 거야. 그 배가 우리 한국인 관광객을 떼죽음으로 몰고가는 대형사고를 낼 줄 그때 그 누가 알았겠어?
강변을 벗어난 우리는 데악 지하철역을 향해 걸었어.
데악 지하철 역 주변 공원에는 젊은이들 천지였어.
부다페스트의 눈이라는 별명을 가진 회전관람차가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어.
하루 종일 걸었으니 다리가 아팠어.
지하철 3호선을 타기 위해서 또 걸어야했어. 그날 우리들에게 닥친 큰 문제는 하룻밤 우리 몸을 누일 호텔을 새로 구해야한다는 것이었어.
문제는 연휴기간이어서 부다페스트 시내의 거의 모든 호텔방이 동나버렸다는거야. 싼 방은 구할 수가 없었고 비싼 방만 남았어. 하룻밤에 50만원 정도나 주고 잠잘 수야 없지 않겠어?
차비 아끼기 위해 지하철 타고 돌아다니는 우린데 말야.
우리는 지하철을 탔어.
지하철 입구에 마련된 이 기계를 잘 봐두어야할거야. 여기에 표를 밀어넣으면 끝부분이 조금 잘릴 거야. 그게 합법적으로 편칭된 증거야. 그걸 안하고 탔다가 검표원들에게 걸리면 엄청나게 비싼 호된 벌금을 물어야해.
줄기차게 인터넷을 뒤진 끝에 공항 부근에서 아파트 하나를 구했어. 2박에 40만원이었어.
거길 또 어떻게 찾아가야하는지 그 방법을 조사해두어야했어. 아파트 예약은 해두었지만 주인을 어떤 식으로 어디에서 만나야하는거지? 자유여행이 좋아보이고 자유로워보여도 이런 식으로 해결해야할 문제가 쌓이고 쌓인 여행이기에 경우에 따라서는 골머리를 앓게 되는거지.
지하철을 탔지만 머리가 아팠어. 현재 머무르는 호텔에 그냥 머물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고 싶지? 연휴때문에 빈방이 없었던거야. 부다페스트 전역이 거의 그랬다니까.
마음이 무거워졌어. 내일 아침에는 방을 비워주어야하니까 말야. 2박에 40만원이라면 1박에 20만원이고, 일인당 4만원인 셈이니까 싼 가격은 아니야. 하루 칠만원 짜리 여행을 해야할 처진데 비교적 물가가 싼 동유럽에서 돈을 너무 쓰면 그리스에선 어떻게 견뎌야하지?
어제 식사를 했던 터키 식당에 가서 저녁을 먹기로 했어.
나는 밥과 닭고기와 파스타 비슷한 수프를 먹었어. 그랬더니 1800포린트가 나오더라고. 우리돈으로 치자면 7,200원짜리 식사가 되는 셈이지. 이런 식으로 여행하면 끝판에는 돈이 달랑거릴텐데..... 몸도 마음도 다같이 지쳐버렸던 하루였어.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