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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18 일본 자전거 여행-간사이(完)

오사카로 달리다 3

by 깜쌤 2019. 3. 19.


여긴 누가봐도 우리나라 풍경이다.



삼국시대 당시, 일본으로 건너간 도래인들의 가슴에 어떤 감정이 들었을지가 가슴에 쉽게 와닿는다. 


 

우리는 요도가와 제방 밑으로 이어지는 자전거도로를 달려나갔다.


 

제방에는 잔디 이식작업이 한창이었다.



사진만 보면 영락없는 우리나라다.



자동차길처럼 너른 자전거도로에는 중간중간에 차량진입 금지시설이 만들어져 있었다.



상당히 교묘한 시설이다. 자전거가 통과하기에도 조금 어렵다.



 

특히 트레일러 달린 자전거가 통과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강변에는 미니 골프장도 만들어져 있었다.



게이트볼 구장이 아닌 진짜 골프장이다.



우리는 하류를 향해 달려나갔다.



야구장이 나타나기도 했다.



사회인 야구팀인가보다. 시합을 하고 있었다.



간이화장실에 들렀다가 나왔다.



우리도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간사이 의과대학 부속병원 건물이 제방 쪽에 보인다.



우리는 벌써 오사카부로 넘어온 것이다.



어도 구성이 특이하게 이루어져 있었다.



한번씩은 포장되지 않은 구간이 나타기도 했다. 


 

풀냄새가 획 끼쳐졌다.



여기 자연은 상당히 건강한 것 같다.



일본은 미세먼저 걱정이 거의 없는 나라 같아서 부러웠다.



제방 너머로는 시가지다.



오사카 인근은 도시의 집합체나 마찬가지다.



요도가와 위에는 많은 다리들이 걸려있었다.



한번씩은 순시선이 지나가기도 했다.



강변 정비 솜씨가 놀라울 정도다.



싸구려라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어디쯤이었을까?



현재 우리 위치를 추적해볼 필요도 없이 시가지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며 달렸다.



벌써 몇개의 다리를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하천에 토끼풀이 자욱하게 자라고 있었다.



네잎 클로버 잎을 찾던 어린 시절이 그립기만 하다.



내가 어렸을땐 4H 클럽 운동이 한창이었다.


 

요즘 젊은 세대들이 4H 클럽 운동에 관해 들어보기나 했으랴? DAUM 백과에서는 그 운동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나무 그늘에다 자전거를 세우고 간식을 먹기로 했다.  간식을 먹고는 이내 다시 출발했다.




4H클럽(4H Club)

ⓒ US Government/wikipedia | Public Domain

                                

10~21세의 청소년들이 참여하며 약 80개국에 퍼져 있지만 주로 미국과 캐나다에서 활동하고 있다. 4H 클럽의 상징은 각 잎마다 H자를 새긴 네 잎 클로버이고, 상징색은 녹색과 흰색이다. 4H라는 이름의 의미는 다음의 맹세에 나타나 있다.



"나는 나의 클럽과 나의 공동체와 나의 나라를 위하여/나의 머리(Head)를 더 명철하게 생각하는 데/나의 가슴(Heart)을 더 위대한 자부심을 가지는 데/나의 손(Hand)을 더 큰 봉사를 하는 데/나의 건강(Health)을 더 나은 삶을 위해 바치기로 맹세한다".



이 단체는 20세기초 미국의 농촌 젊은이들 사이에서 생겨나기 시작하여 1924년경 일반화되었다.

미국에서는 농무부와 군(郡) 행정기구뿐 아니라 토지가 무상불하된 단과대학과 대학교의 공개강습을 통해 성인관리자들이 양성되었다. 1914년의 스미스레버 법 규정과 연이은 연방의회와 주 법령 아래 이들 기관은 관리자양성사업에 협력하고 있다.



4H클럽은 농촌 젊은이들의 조직만이 아니다. 농가의 50%, 농촌 비농가의 30%, 도시지역의 20%가량이 등록되어 있다. 규모는 다르지만 평균 24명의 회원을 가진 각 지역 클럽에서는 자체의 간사를 선출하고 청년지도자의 도움을 받는 1명 이상의 성인지도자의 안내와 지시를 받아 자체 프로그램을 계획하고 실행한다.



4H클럽이 행하는 활동은 50여 가지가 넘는다. 예를 들어 널리 행해지는 농촌활동들 중에는 농작물 재배, 화원 가꾸기, 가금(家禽) 키우기, 암퇘지와 새끼돼지의 구매·사육·관리, 낙농우 키우기, 낙농축사 짓기, 판매용 식용우 키우기, 트랙터와 다른 농기구의 가동·유지·보수 등이 있다.


농촌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도시 젊은이들을 위해 개발된 전형적인 4H클럽 활동에는 자동차 정비와 안전, 개 보호와 훈련, 전기전자 실습, 실내정원 가꾸기, 잔디 깎는 기계의 작동 및 안전교육 등이 있다.



가정경제에 관한 사업으로는 음식준비, 바느질, 세간설비 마련과 같은 기초적인 활동이 있다. 또한 미국의 주요 연중행사 가운데 하나가 미국 4H클럽 대회로서, 4H 클럽 활동에서 뛰어난 업적을 보인 회원들에게 포상으로 '대표자'(delegate)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이 행사는 협동신장봉사단과 청소년의 클럽 활동을 위한 국립위원회가 함께 추진한다.



월간잡지 〈국립 4H 뉴스 National 4-H News〉를 발간하고 4H활동을 장려하는 국립위원회는 시민과 비영리법인의 사적인 후원으로 운영되는 자원봉사단체이다. 한국에서는 일제강점기부터 4H클럽이 결성되었지만 본격적인 활동이 있었던 것은 1960년대 이후였다. 민간주도형의 대표적인 계통적 지역사회운동이었지만, 정부가 농촌 청소년들에 대한 사회교육을 목표로 착수한 것으로 농촌지도사업의 중요한 모체가 되었다.



이 운동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1960년의 4·19혁명을 계기로 면면히 이어오던 대학생 중심의 농촌계몽운동이 거의 모든 대학에 농촌관계 대학생조직이 결성될 만큼 활기를 띠고 방학 때마다 많은 대학생들이 농촌으로 향하게 되면서, 1930년대에 보였던 이상주의적 농촌지역사회 계몽운동이 이 시기에 대학생 농촌운동으로 계승되었던 사회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또한 이 운동과 거의 같은 시기에 시작된 민간주도형의 지역사회운동인 '지역사회 개발사업'이 반관반민(半官半民)의 형태로 1958년 착수되었다가 정부의 지원이 중단됨에 따라 4H클럽 운동이 발전하는 하나의 계기를 형성했다.



4H클럽 운동은 농가나 부락에 대한 지원사업이 아니라 처음부터 농촌의 청소년지도사업을 목표로 사회교육적인 면을 강조한 운동이었다. 부락을 단위조직으로 하여 군연합회·도연합회·중앙협의회로 조직되어 있었지만 핵심적 운동단위는 부락이었고, 부락 청소년층에서 자생적인 지도자가 나왔다.



이처럼 지원사업에 바탕을 두지 않은 운동이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많은 농촌지도자층을 육성할 수 있었다. 1970년대 정부주도의 새마을운동의 주역을 담당한 농촌지도층은 대부분 4H클럽 운동을 통해 육성된 사람들이었다.


글의 출처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b11s0470a




선구자들의 노력이 우리가 사는 사회를 바꾸어나가는 법이다.



이제 슬슬 도시 냄새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