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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18 일본 자전거 여행-간사이(完)

교토 - 금각사 1

by 깜쌤 2019. 2. 19.


새날이 밝았다. 2018년 6월 12일 화요일, 자전거 여행 8일째다. 내일은 교토를 떠날 생각이다.



우리는 며칠 전에 다른 호텔도 예약해두었었다. 좀 비싸고 좋은 호텔로 한번 옮겨볼 생각이었기에 말이다.



일단 아침부터 먹으러 나갔다. 어느 나라에서든 아침식사를 느긋하게 하긴 어렵다. 아침을 제공해주는 호텔이 아니라면 말이다.



수학여행을 온 아이들이 선생님 인솔하에 골목길을 지나고 있었다. 시끄럽게 굴지않아 좋았다.



덮밥 전문집 수키야를 찾아갔다. 어쩌면 일본인들은 스끼야로 발음할지도 모르겠다.  



메뉴판을 훑어보았다.



낫토 날계란 조식보다는 처음에 본 것이 마음에 든다.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해결하려면 3,500원 정도로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에서는 우리나라보다도 저렴하게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내가 선택한 것은 밥과 된장국, 가다랭이포와 고기 조금이다. 비벼먹었다. 맛있다.



건너 옆에 백인 커플이 앉아있었다. 프랑스인이라고 생각되었는데 남자는 론리플래닛을 펴서 여자에게 읽어주고 있었고 여자는 그 내용을 들으면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스케치북을 넘길 때 흘낏 보았더니 이스탄불 모습도 보인다.


 

내가 먹은 것이 340엔 짜리였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다시 호텔로 돌아갔다. 빈병 배출은 이렇게 하는 것이구나.....



호텔로 돌아온 우리들은 짐을 정리했다.



그리고 모닝 커피 한잔을 마셔두었다. ㄱ사장은 이런 일에 전문가다. 이번 여행에 정말 크나큰 기여를 한 분이다.



편의점에 갔을 때 세밀하게 살펴서 구해온 모양이다.



상업화된 제품이긴 하지만 드립 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종류를 각각 다르게 구해와서 다양하게 맛볼 수 있었다.



방안 물건 정리를 깔끔하게 해두고 쓰레기도 확실하게 분류해서 비닐 봉지에 담아두었다.



호텔 방을 사용한 뒤에 정리도 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물건을 남겨두고 가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지만 이는 커다란 오산이다. 



요즘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호텔 기물을 가지고 나가거나 파손을 했을 경우 카드번호를 추적해서 소송이 들어오거나 변상요구가 날아올 수도 있으므로, 소비자의 입장에서도 나갈 때에는 방안의 모습을 촬영해두는게 현명하다. 



이런 스타일의 가족호텔이나 민박을 했을 경우에는 나름대로 방어조치를 해두는 것이 여러모로 현명한 방법이다.



이런 것들은 그동안의 온갖 여행 경험을 통해 얻은 교훈이다.



우리가 퇴실할 때까지도 직원은 나와있지 않았다. 자전거를 끌고 교토기차역 앞에 있는 교토 타워호텔에 찾아갔다.



체크인 시간이 되지 않았기에 8층에 올라가 프런트에서 예약여부를 확인해두고 나서 트레일러를 떼어 호텔에 맡겨 두었다. 그리고는 물표를 받아두었다. 오후 6시경에 입실하기로 하고 호텔을 나섰다.



오늘의 첫 행선지는 금각사다. 뒤에 보이는 건물이 교토 기차역이다.



일단 동쪽으로 나가서 가모가와(=압천)를 따라 펼쳐진 자전거도로를 따라 북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맑은 물이 흐르는 개울로 나오니 기분이 툭 터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제 달려본 길이지만 오늘은 새로운 느낌이 들었다. 아래 지도를 보자. 클릭하면 확대되어 뜰 것이다.




1 : 교토 역 위치 - 출발점이다.

2 : 금각사(=긴가쿠지)

3 : 용안사(=료안지)

노란색 점들 : 이동경로를 의미한다.



노선은 간단했다. 계속 북상하다가 서쪽으로 직진하면 되는 것이기에....



눈에 익은 풍경이다.



나는 시인 정지용을 떠올렸다.



정지용은 1902년생으로 충북 옥천 출신으로 본관은 연일이다.



서울 휘문고보를 나와서 휘문학원 장학금을 받아가며 일본 교토의 도시샤대학(어제 저녁에 우리가 방문했었다) 영문학부에서 공부를 했다.



학업을 끝내고는 귀국후 휘문고보에서 교사를 하다가 광복후에 이화여대로 옮겼다. 문학과 라틴어를 강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때는 경향신문 주필로도 활동했다.



지금 우리가 달리고 있는 압천(-가모가와)을 거닐며 쓴 시가 동지사 대학교 교정의 시비에 새겨져 있음은 저번 글에서 소개해드린바 있다.



정지용의 시작품은 워낙 강렬해서 많은 후배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우리가 잘 아는 청록파 시인인 박두진, 조지훈, 박목월 같은 이도 그의 추천으로 문단에 등장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국전쟁(=6.25 전쟁) 당시인 1950년에 납북되어 북으로 끌려가다가 동두천 부근 어디에선가 미군 폭격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런 주장의 근거는 북한측 자료라고 한다.



가모가와 강변에서 도로로 올라와 서쪽으로 달렸다.



도로위 표지판에는 금각사라는 글씨가 선명했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