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깜쌤의 세상사는 이야기 : '난 젊어봤다' - 자유 배낭여행, 교육, 휘게 hygge, 믿음, 그리고 Cogito, Facio ergo sum
  • 인생 - 그리 허무한게 아니었어요. 살만했어요
배낭여행기/18 일본 자전거 여행-간사이(完)

교토 뒤지기 - 애국시인 윤동주 시비

by 깜쌤 2019. 2. 12.


민족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윤동주도 창씨개명을 했다. 평소동주(平沼東柱 히라누마 도쥬)가 창씨개명한 그의 새 이름이다.



그가 그렇게 창씨개명했다고해서 윤동주를 두고 친일파 시인이며 민족의 배반자라고 싸잡아 비난할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현재 자기가 살고 있는 시점을 기준으로만 단순하게 판단해서 지조없는 시인이었다고 싸잡아 비난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윤동주 시인은 창씨개명을 하기 전 북간도 용정에서 시를 써서 남겼는데 그게 참회록이라는 시다. 참회록 시는 1942년 1월 24일에 지은 것으로 나타나있다. 그가 창씨개명을 신청한 날이 1월 19일이고 정식허가를 받은 날이1942년 1월 29일로 기록되어 있다는데 그런 이야기의 근거는 연희전문학교에 남아 있는 학적부라고 한다. 



창씨개명을 한 이유는 일본 유학을 가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남을 끝까지 정죄하고 편가르기를 좋아하는 어떤 이는 일본 유학을 안가면 되지 않았느냐고 할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들과는 말을 안섞는 것이 현명하리라.

 



참회록
                                                                              -  윤동주  -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王朝)의 유물(遺物)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懺悔)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 사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告白)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윤동주 시인이 제일 먼저 입학한 학교는 입교立敎(=릿교)대학 영문과였다. 원래는 고종사촌인 송몽규와 함께 도쿄대학에 지원했으나 송몽규만 합격하고 그는 떨어졌다. 송몽규는 윤동주보다 석달 일찍 태어났는데 그의 어머니가 윤동주의 고모인 윤신영이다. 송몽규라는 이름은 반드시 기억해두는 것이 시인의 일생을 이해하는데 편하고 좋다.



자전거를 끌고 동지사대학 안으로 들어서서 천천히 걸었다. 이 교정을 윤동주 시인이 걸었으리라. 내가 그를 알게 된 것은 학창사절이었다. 국어 교과서에 소개된 "별 헤는 밤"을 읽게 되므로써 알게 되었다. 나는 아직도 그 시 속에 등장하던 이국소녀들의 이름 - 패, 경, 옥 - 들이 기억난다.   



다시 윤동주 이야기로 돌아가자. 그는 1942년 4월에 릿교대학(立敎 입교대학)에 들어갔고 이듬해에 동지사대학으로 옮겼다. 윤동주가 다닌 연희전문학교는 기독교계 학교였고 동지사대학도 일본에서는 아주 보기 드물게 기독교계 학교라는 사실을 알아두면 이해하기가 편하다. 사진 속에도 예배에 관한 안내가 되어있다. 윤동주의 할아버지도 교회 장로였다.



윤동주와 정지용의 시비(詩碑)를 찾는 것은 너무도 쉬웠다. 두개의 시비가 붉은색 벽돌 건물 사이에 나란히 늘어서있었다. 시비를 보는 순간 눈시울이 확 뜨거워졌다.


 

정지용의 시비는 살짝 기울어진 반원형 모습이다. 화병에는 모조일것 같은 무궁화가 꽂혀있었고 시비 앞에는 태극기와 일장기가 보였다. 누가 다녀갔는지 국화꽃과 비닐에 싼 꽃 몇송이가 남아있었다.



정지용의 시비에는 압천이 새겨져있었다. 시 압천(=가모가와)은 저번 글에서 소개해드린바 있다.





그런 모습은 윤동주의 시비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커리커쳐가 시비 앞을 지키고 있었다.



윤동주는 광복되던 해 일본 큐슈의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죽었다.



그가 형무소에 갇혀있을 때 수없이 모진 고문을 당하고 밤마다 불려나가 이름모를 주사를 맞았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1945년 3월 7일에는 송몽규도 같은 감옥에서 눈을 뜬채로 죽었다. 스물일곱 꽃다운 나이였다.


 

P형님이 헌화를 하고 계셨다. 형님은 한없이 속깊은 분이기에 헌화하는 장면을 보자 눈물이 샘솟아올랐다.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었다. 사방은 고요했고 나뭇잎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사방에 들어찬 정적을 깨뜨렸다.



윤동주시인은 송몽규가 죽기 한달전인 1945년 2월 16일에 죽었다. 치안유지법 위반이라는 죄목으로 체포된 것이었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안다.



부모님과 일가친척들이 전보연락을 받고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서 형무소를 방문했을때 윤동주가 밤마다 불려나가 주사를 맞았다는 사실을 고종사촌형인 송몽규가 증언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때 일본에서 대학을 다녔던 조선인이었다면 광복후 우리나라를 책임질 최고의 엘리뜨 그룹이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그들 형제는 엘리뜨 말살정책에 희생된 희생양일수도 있다. 조선이 다시 일어서지 못하도록 의도한 악랄한 계획의 일환으로 행해졌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1945년이라면 일본의 패망이 확실하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왜인들의 그 악랄함을 우린 잊어버리지 않아야한다. 1990년 우리정부는 애국시인 윤동주에게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여 명예를 기렸다. 참고로 글상자 속에 관련 자료를 공개한다.  


1977년 10월, 일제 내무성 경보국 보안과에서 발행한 극비문서 〈특고월보(特高月報)〉 1943년 12월분에 실린 윤동주, 송몽규의 심문 기록 〈재경 조선인 학생민족주의 그룹사건 책동 개요〉가 입수되면서 알려지지 않았던 두 사람의 투옥 혐의가 밝혀졌다.


또 2년 뒤인 1979년 1월에는 일제 사법성 형사국 발행의 극비문서인 〈사상월보(思想月報)〉 제109호 1944년 4~6월분에 실린 송몽규에 대한 판결문과 관련자 처분결과 일람표를 통해 윤동주와 송몽규의 형량이 알려졌고, 두 사람의 혐의가 ‘독립운동’이었음이 처음으로 확인되었다.


1982년 8월에는 교토지방재판소의 판결문 사본이 입수되면서 두 사람의 옥사에 관련된 전모가 완전히 밝혀졌다. 그에 따라 1990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는 윤동주에게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출처 : 한국사 인물열전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47XXXXXXh049





사방이 촉촉하게 젖어들고 있었다.



내 가슴에도 비가 내렸다.



내가 좋아하는 가곡중에 '향수'라는 노래가 있다. 가사에 해당하는 시를 쓴 이가 정지용이다. 정지용시인의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자 한다.  



정지용은 동지사대학을 제법 오래 다녔다. 윤동주가 존경했던 선배시인이기도 하다.



조용히 도시샤대학 구내를 빠져나왔다.



교문이 저만큼 앞에 다가왔다.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이번 자전거 여행에서 가장 의미있는 순간이었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