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깜쌤의 세상사는 이야기 : '난 젊어봤다' - 자유 배낭여행, 교육, 휘게 hygge, 믿음, 그리고 Cogito, Facio ergo sum
  • 인생 - 그리 허무한게 아니었어요. 살만했어요
배낭여행기/18 일본 자전거 여행-간사이(完)

교토 뒤지기 - 은각사 1

by 깜쌤 2019. 1. 29.


한줄로 심은 정원수를 유럽 스타일로 무자비하게 손을 보아서 성벽처럼 보이도록 해두었다. 매표소에서 500엔을 주고 입장권을 샀다.



입장권 대신 개인 및 가정의 복과 평화를 비는 부적 비슷한 종이를 준다.



우리들에겐 부적이 별로 의미를 주지 못하지만 기념으로 사진을 찍어두었다. 안으로 들어섰다.


 

하얀 벽을 지닌 건물들이 여기저기 터잡고 서있다.



일본 절들이 주는 분위기는 우리나라 절이 주는 느낌과 차이가 난다.



모래로 단장한 정원이 일본다운 느낌을 던져주었다.



저 문을 들어서면 진짜 은각사의 모습이 드러난다. 은각사를 비롯한 일본의 절과 유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본 역사에 반드시 등장하는 막부(=바쿠후)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다. 정상적으로 학교 공부를 한 사람들이라면 그 정도는 다 알고 계시겠지만 그래도 아는 기억을 다시 한번 되살린다는 의미에서 막부라는 용어부터 이해를 하고 넘어가자.



일본 말로 바쿠후라고 하는 막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겠다. 아래 글 상자속에 들어 있는 내용은 DAUM 백과사전에서 가져온 내용이다.


1192~1868년에 실질적으로 일본을 통치한 세습적 군사독재자인 쇼군[將軍]의 정부. 1185년 무사들의 지도자였던 미나모토 요리토모는 일본 전역에 걸쳐 군사력을 장악하고 7년 후 쇼군이 되어 가마쿠라에 최초의 바쿠후를 설치했다. 덴노 정부의 법적인 귄위는 그대로 인정되었지만 궁극적으로는 가마쿠라 바쿠후가 군사·행정·사법 기능을 장악했다.


가마쿠라 바쿠후는 각 구니의 우두머리로 총독 역할의 슈고를 임명하고 개인영지에 대한 감시자로 지토를 임명함으로써 효율적인 지배조직을 확립했다. 이후 도쿠가와 바쿠후는 일본에서 가장 강력한 중앙정부로서 덴노와 다이묘, 종교지도자들을 통제했으며 도쿠가와 가문의 영토를 관장하고 외교업무까지 다루었다. 도쿠가와 바쿠후가 에도에서 발전시킨 중앙집권적 행정체계는 19세기말 새로 들어선 덴노정부의 토대가 되었다.


글의 출처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b08b3271a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들어보기로 하자. 글의 출처는 역시 DAUM 백과사전이다. 우리말 한자 발음은 내가 달아두었고 읽기에 편하도록 문단도 나누었으며 이해를 위해 괄호속에 첨가한 부분이 있음도 미리 밝혀둔다.

 




쇼군(세이이다이쇼군[征夷大將軍 정이대장군]을 줄인 말)이라는 칭호는 8세기경 일본 북부 아이누족 정벌을 위임받은 군사지휘관에게 처음으로 적용되었다. 법적으로 쇼군의 지위는 덴노(천황)의 통제하에 놓여 있으며 권한도 국가의 군사력을 관장하는 데 국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본 사회의 봉건적 성격이 강해지면서 군사력의 장악이 곧 국가의 장악을 의미하게되자 덴노는 교토[京都 경도]의 궁정에서 상징적인 존재로 남게 되었고, 쇼군이 실질적 통치권자로 부상했다.


1185년 무사들의 지도자였던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 원뢰조]는 일본 전역에 걸쳐 군사력을 장악하고 7년 후 쇼군이 되어 가마쿠라[鎌倉 겸창 - 오늘날의 도쿄부근]에 최초의 바쿠후[幕府 막부]를 설치했다. 덴노정부의 법적인 귄위는 그대로 인정되었지만 궁극적으로는 가마쿠라 바쿠후가 군사·행정·사법 기능을 장악했다.


가마쿠라 바쿠후는 각 구니[國 국]의 우두머리로 총독 역할의 슈고[守護 수호]를 임명하고 구니의 분할로 생겨난 개인영지에 대한 감시자로 지토[地頭 지두]를 임명함으로써 효율적인 전국 지배조직을 확립했다.

                                      

1333년 가마쿠라 바쿠후가 와해된 후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가 수도 교토에 자신의 정부를 세워 바쿠후의 부활을 꾀했다. 그러나 차츰 독립적 성격을 강화해아가고 있던 슈고 세력들은

16세기에 이르러 다이묘[大名]라고 불리며 사실상의 군벌 영주로서 곧 아시카가 바쿠후(=무로마치 바쿠후)의 권력을 잠식해들어갔다.


160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덕천가강]가 다이묘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하고 에도[江戶:지금의 도쿄]에 3번째 바쿠후를 세웠다. 도쿠가와 바쿠후(=에도 바쿠후)는 일본에서 가장 강력한 중앙정부로서 덴노와 다이묘, 종교지도자들을 통제했으며 도쿠가와 가문의 영토를 관장하고 외교업무까지 다루었다.

                                                                                 

1862년 이후 도쿠가와 바쿠후는 개국에 따른 위기상황에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격심한 변화를 겪었으나, 1867년 마지막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 덕천경희]가 덴노에게 내정과 군사업무에 관한 관할권을 양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도쿠가와 바쿠후가 에도에서 발전시킨 중앙집권적 행정체계는 19세기말 새로 들어선 덴노정부의 토대가 되었다.


글의 출처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b08b3271a

 




슈고다이묘덴노 같은 말을 모르면 일본 역사를 이해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은각사를 알기 위해서는 이런 용어들부터 알고 덤비는게 도움이 된다. 은각사는 무로마찌 바쿠후의 쇼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마사가 1482년에 만들었다.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할아버지가 역시 쇼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미츠다. 그가 만든 유명한 절이 일본을 상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금각사다.



금각사를 가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2층 누각 전체를 금으로 입혀서 처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두눈을 의심하게 만든다.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자기가 살 저택과 정원을 지은 뒤 누각을 은으로 입히고 싶어했다.



바로 저 멀리 보이는 건물을 은으로 덧칠하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건물이 완공되기 전에 죽어버림으로서 그의 꿈은 백일몽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후 이름과 용도도 바뀌고 만다. 그의 법명이 자조(慈照)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용도가 저택에서 절로 바뀌게 되었고 교토의 동쪽산에 있었기 때문에 이름조차 동산자조사(東山慈照寺 히가시야마 지쇼지)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러면 무슨 의도로 왜 만들었는지가 궁금해진다. 이걸 알기 위해서는 막부와 쇼군같은 용어를 아는게 먼저다. 이제 일본 역사에 유명한 오닌의 난( 応仁の乱 응인 난 1467~1477)부터 알아보기로 하자. 설명하려면 한참 걸릴테니 다시 위키백과사전의 설명을 조금만 인용해본다. 


오닌의 난(應仁-亂)은  무로마치 막부 오닌(應仁 응인) 원년(1467년) 1월 2일에 쇼군 후계 문제를 둘러싸고 지방의 슈고 다이묘(守護大名)들이 교토에서 벌인 항쟁이다. 사건의 발생 시점의 연호를 따서 오닌의 난으로 불리는 것이 통상이지만, 주요 사건의 대부분이 분메이(文明) 연간에 걸쳐 있었다 하여 오닌·분메이의 난(應仁・文明の亂)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쇼군의 후계자 자리를 놓고 다툼이 일어나 것인데 지방 호족들까지 가세하며 대판 전쟁이 벌어진 것이라고 보면 된다.



전란은 11년간이나 계속되었고 교토는 폐허나 다름없게 변하고 말았다. 막부는 권위를 잃었고 쇼군들은 제명에 죽지 못하는 비극에 휩싸이고 말았다.



역사의 아이러니하고나 할까? 이런 혼란과 전란이 판을 치던 시대에 히가시야마 문화라는 독특한 문화가 교토에서 부터 발생하기 시작했다. 


 

쉽게 말하자면 한가함과 우아함을 추구하는 문화적인 흐름이 발생했다는 말이 된다.


 

하가시야마(東山 동산)문화는 건축에서는 은각사의 예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구조물이 등장했으며 정원에서는 가레산스이(枯山水 고산수)라 불리는 새로운 유형이 등장했다. 자는 '마르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뿐만 아니다. 히가시야마문화의 영역에는 수묵화, 다도, 화도(花道)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화도는 일본 특유의 꽃꽂이인 이케바나를 의미한다.



오닌의 난 중에 사태를 수습해야하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는 현실 도피적인 참선에 들깊이 빠져들었고 은각사를 조성했으며 그 여파로 히가시야마 문화가 융성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칼부림과 살륙이 밥먹듯이 벌어지는 현실을 외면하고 쇼군이었던 요시마사는 누각에 걸터앉아 참선을 수행했고 정원의 고요함과 아름다움에 심취했으니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모르겠다.  


 

세월이 흘러 에도시대가 되고 난 뒤 요시마사의 염원대로 긴가쿠지(=은각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가 은각사 안에 정원을 만들었는데 작은 못도 함께 등장한다. 그게 금경지(錦鏡池 긴쿄치)다.



긴교치(=금경지)와 하얀 모래 정원인 은사탄이 은각사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상징물이라면 건물로는 동구당은각이 유명하다.



동구당은 일본의 국보로 정해져 있다.




은각 앞에는 모래 더미가 보이는데 그건 후지산을 상징하는 고케츠다이(向月臺 향월대)라는 이름을 다진 망월대(望月臺)다. 이제 이끼 가득한 산으로 올라가보자.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