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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안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나라안 여기저기 in Korea

영주에서 봉화까지 3

by 깜쌤 2019. 1. 2.


봉화역을 보았으니 이제 다시 영주로 돌아갈 차례입니다.



기껏 봉화역 하나 보려고 영주에서부터 자전거를 타고 갔느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날 제가 영주에 갔던 이유는 정작 따로 있었습니다. 그건 다음 기회에 다른 글에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봉화가 자랑하는 닭실 마을은 예전에 다녀온 곳인데다가 다른 명소는 오늘 둘러볼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습니다. 



오늘 봉화까지 왔으니 시간에 쫒기더라도 반드시 찾아보고 가야할 곳이 있었습니다. 바로 철도관사 마을입니다. 남들에게는 의미없는 장소일지도 모르지만 장소와 사건에 대한 추억은 사람마다 다른 것이기에 꼭 가보고 싶었습니다.


 

거의 오십몇년만에 찾아보려고 하니 어디가 어디인지 도저히 구별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말이지 봉화 철도관사 마을을 두세번 다녀왔던 기억만으로 옛터를 찾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골목으로 들어가서 마당에서 일을 하시는 할머니들께 여쭈어본 결과 봉화기차역에서 영주쪽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조금 내려가다가 마주치는 엘피지(LPG) 충전소 부근이  바로 철도관사가 있었던 터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엘피지 가스 충전소 뒤에 철도관사가 있었다고 했는데 막상 가보니 자그마한 흔적도 없이 말끔하게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종조부와 5촌 당숙 형제들이 계셨던 곳은 대홍수가 쓸고 지나간 자리처럼 말갛기만 했습니다.


 

나와 제일 가까운 친척이 당숙인데 그 분도 이제는 칠십이 다 되었으니 그 어른이 돌아가시면 어디가서 확인할 길도 없게 될 처지입니다.


 

종조모와 종조부 두분 얼굴만 아삼삼할뿐 사진 한장 가진게 없으니 기억을 되살릴 일이 없었습니다. 돌아가신 선친과 종조부와의 관계속에 얽힌 이야기들은 이런 사이버 공간에서 밝힐 수가 없습니다. 집안사니까요.



모든 게 너무 허무하기만 했습니다. 당숙이 살아계실때 사진 몇점 가진게 있으면 함께 보며 이야기도 듣고 촬영을 해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생살이가 이렇게 허무한 것 같습니다.



중앙선 기차역중에 철도관사가 온전하게 남아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 중앙선에서 안동 아래쪽으로는 안동부근의 이하역과 화본역, 울산 부근의 남창역 정도에만 흔적이 조금 남아있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삼년 안으로 중앙선 전철화와 직선화가 이루어지면 그런 유적들도 역사속으로 곧 사라져갈 것입니다.



LPG 충전소를 지나자 곧 이어서 송록서원이 나타났습니다. 한국유림 독립운동 파리장서비라는 안내판이 나타나기에 깜짝 놀랄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습니다. 파리(巴里)라면 프랑스 빠리를 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송록서원이라는 이름은 처음 들어보았습니다.



서원입구 왼쪽에 기품을 지닌 비가 우뚝 서있었습니다.



한국유림독립운동파리장서비라는 긴 이름을 지닌 비입니다.



무슨 말인가싶어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더니 다음백과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한국 유림은 파리에서 열린 세계평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서한을 제출해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떨친 공헌을 한 바, 이를 기념하기 위해 대통령희사금과 국민의 성금 등으로 1972년 10월 서울 중구 장충단공원에 비를 건립하였다.


파리 장서(長書)는 일제의 한국 주권 찬탈 과정을 폭로하고 식민 지배의 불법성과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하여 한국의 모든 계층과 사회 집단이 독립을 열망하고 있음을 국내외에 널리 알렸던 서한이다.곽종석, 김복한을 비롯하여 유림 대표 137명이 연서한 이 장서를 김창숙으로 하여금 상해로 가져가도록 하였고 이를 다시 김규식을 통하여 파리 강화회의에 제출되었으며 또한, 각국 대표와 외국 공관과 국내 각지의 향교에도 배포되었다.


일본은 파리장서 운동에 참가한 유림들은 체포 투옥하는 등 가혹하게 탄압하였으며(제1차 유림단 사건), 이 사건을 계기로 유림계는 한말 구국운동의 전통을 계승하여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다.


출처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52XXX1836287




원래는 서울 장충동에 건립되었던 것으로 들었는데 봉화에 이런 비가 또 있으니 어떤 연유인지 궁금했습니다.



 파리에 보낸 독립청원서에 서명한 분들이 모두 137명이었다고 합니다.



경북 출신 유림들은 모두 45명이었는데 그중 아홉분이 봉화출신들이었다고 하네요. 그런 연유로 봉화에도 한국유림 독립운동 파리장서기념비가 세워진 모양입니다. 참고로 할 수 있는 동영상 화면의 주소는 글 상자 속에 있습니다.


http://andongmbc.co.kr/adboard/NewsView8508 


봉화에 파리장서 기념비가 서게 된 뉴스화면의 출처



파리장서 기념비를 살펴본 뒤 계단을 걸어올랐습니다.



서원 출입문이 굳게 잠겨있었기에 까치발을 해서 담너머로 살필 수밖에 없었습니다.



동재와 서재가 보입니다.



송록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 사건 이후 그 맥이 끊겨 사라졌다가 2006년에 복원되었다고 합니다.



나름대로 유명한 지방의 유림 선현들을 모신 곳이네요.



서원 앞 빈 공간에는 정자가 자리잡았습니다.



멀리 내성천과 주변의 벌판이 펼쳐집니다.



송록서원을 보며 봉화 유림들의 역사와 활약상을 짐작해볼 수 있었습니다.



봉화에서 영주쪽으로는 산이 열려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제법 들이 너르게 펼쳐진 곳이 봉화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습니다.



계단을 걸어내려왔습니다.



뒤를 돌아다보았습니다.



그냥 훌쩍 떠나버리기엔 너무 아쉬워서 정자에도 가보았습니다.



그런 뒤 자전거에 올랐습니다.



해저(바래미) 마을 앞을 그냥 지나치려다 마음을 고쳐먹고 안으로 들어가보기로 했습니다. 나는 작은 개울 둑길을 따라 마을로 다가갔습니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