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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생 - 그리 허무한게 아니었어요. 살만했어요
사람살이/옛날의 금잔디 Long Long Ago (고향)

그 옛날에

by 깜쌤 2018. 11. 14.

 

나는 할아버지 얼굴을 못 뵈었습니다. 삼촌이 없었으니 사촌도 없었습니다. 고모가 안 계셨으니 고종사촌도 모르고 자랐습니다. 거기다가 이모도 없었습니다. 이모가 없었으니 이종사촌이란 말도 몰랐습니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도 못 뵈었습니다. 외삼촌 한 분만 계셨습니다.

 

 

 

요즘이야 이런 현상이 당연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만 제가 클 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대가족제도가 엄연히 살아있었고 일가친척 피붙이들이 한마을에 옹기종기 모여살던 집성촌이 흔하게 널려있던 시절인지라 나 같은 환경은 너무나 낯설기만 한 것이었습니다.   

 

 

 

5학년때 가을 어느 날,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와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우리들을 남겨두고 할머니께서 사시던 마을로 허겁지겁 떠나갔다가 며칠 뒤에 돌아왔습니다. 

 

 

 

내가 할머니를 뵌 것은 초등학교 시절 여름방학때 할머니 집에 가서 몇 번 함께 보내었던 기억밖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 기억의 현장이 바로 여기에 숨어있습니다. 이제는 할머니 집도 다 사라져버리고 남아있는 게 없습니다.

 

 

 

삼촌 한분이 계셨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습니다. 제일 큰 누님은 그 사실을 기억하고 있더군요.

 

 

 

삼촌은 이 마을에서 할머니와 살다가 한국전쟁이 터진 뒤에 징집되어 군대에 갔다고 합니다. 취사병으로 복무를 했다는데 전투에 지친 군인들이 먹을 식사를 준비하는 중에 적의 포탄이 날아와서 터지는 일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 바람에 현장에 있던 군인들은 거의 다 전사를 했다는데 삼촌은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지만 다리에 큰 부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의가사 제대를 하여 집에 돌아왔지만 다리를 심하게 저는 불구가 되었습니다. 그게 원인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몇 년 살지도 못하고 얼마 후 신장병으로 돌아가셨다고 당숙께 들었습니다.   

 

 

할머니께서는 자식을 먼저 하늘로 보내야하는 기구한 운명을 만나야 했던 것이죠. 남편이 일찍 죽고 힘겹게 아들 형제를 기르면서 살았지만 그 아들 하나마저 일찍 저세상으로 보내야만 했으니 팔자가 참으로 험했던 축에 들어갑니다. 

 

 

 

할머니께서는 낙동강 지류인 위천을 건너 군위장에 다녀오셨던 일이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때의 일인데 군위장에 가셔서 손자의 추석맞이 코르덴 옷을 사 오셔서 입혀보시며 좋아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살아계실 때 벌초를 가면 제일 끝 머리에 아버지 혼자서 어디를 슬며시 다녀오셨습니다. 젊었던 날 그 장소에 두세번 따라가 본 적이 있지만 돌아가시기 몇 해 전부터는 혼자서만 다녀오셨습니다. 우리 형제들을 못 오게 하고는 삼촌 묘터에 혼자서만 다녀오셨던 것이죠.

 

 

 

이장(무덤을 옮김)한 할머니 산소 위쪽에 삼촌 묘소가 있다는 사실은 알고있지만 정확한 지점은 기억해내지 못하고 있으니 저도 엄청난 불효자입니다.

 

 

 

아버지 입장에서는 먼저 보낸 동생을 묻은 자리에 다녀오신 것이니 얼마나 허무하고 마음 아프셨겠습니까? 더군다나 결혼도 못하고 총각으로 죽었으니 혈육 한 점 남아있지 않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인생은 안개속에 잠시 떠돌다가 사라지는 덧없는 존재 같습니다.

 

 

 

할머니께서는 본관이 밀양 박씨셨습니다. 공교롭게 어머니께서도 어린 시절, 밀양에 살았던 기억이 있다고 했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 밀양 영남루 부근에서 놀았던 이야기를 해주셨던 사실이 있었습니다. 

 

할머니께서는 1903년경에 출생하셨으니 온갖 역사적 사실을 직접 몸으로 체험하셨습니다. 할머니가 살아오신 시절은 을사조약, 경술국치, 광복과 분단과 한국전쟁등 온갖 역사의 질곡을 다 겪으셨던 세대입니다.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뵈었던 장소가 저만치에 보입니다. 기차역과 보선사무소 사이입니다. 삼십 리 길을 걸어오셔서 레일 밑에 깔아놓는 쌓아놓은 침목더미 사이에서 기차를 타고 안동 쪽으로 올라가던 손주들의 모습을 지켜보시던 그 장면이 아련하게 박혀있습니다.

 

 

 

손주들을 떠나보낸 뒤 할머니께서는 집까지 다시 걸어가셨을 것입니다. 오늘 서재 밖에는 안개가 자욱합니다. 어렸던 시절의 맑고 청명하기만 했던 날들이 그립습니다. 이젠 내가 사진속의 할머니 할아버지처럼 인생의 황혼을 맞이했습니다.

 

 

 

 

 

 

 

어리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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