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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나들이 1 - 제일모직 기숙사

by 깜쌤 2018. 11. 10.


나는 한달에 한번씩은 거의 대구에 갑니다. 주로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죠. 



동대구역에 내려서 지하철을 타러 갔습니다.



대구역에서 내려 지상으로 올라갔습니다.



오늘 약속장소는 대구 북구청건물안입니다.



 30분정도 걸으면 될 것 같았기에 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 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예전 도청으로 연결된 거리, 중앙대로를 따라 걷습니다.



중앙대로를 따라 걸으면 얼마 못가서 홈플러스를 만납니다.



홈플러스에서 북쪽으로 몇걸음만 가면 예전 제일모직 공장터에 이릅니다.



대구 오페라하우스 별관건물이 호암로 건너편에 등장했습니다.



호암은 삼성을 창업한 이병철선생의 호입니다.



제일모직 기숙사 건물을 보존하되 재활용하는 방안을 강구해서 멋진 공간을 만들어냈습니다.



여기는 우리 세대 누이들의 애환이 서려있던 곳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해도 동네 누님들이나 여동생들이 제일모직회사에 일하러 많이들 몰려갔습니다.



공장에 먼저가서 일하던 누이들이 명절때면 시골에 돌아와서 동네에 남아있던 친구들을 만나서 공장에 일하러 가자고 권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공장에 가서 일하면 먹여주고 재워준다고해서 정말 많이들 몰려갔습니다. 거기다가 밤에는 고등학교 과정 공부까지 할 수 있다고 했으니 제일모직 공장은 배움에 굶주린 누이들의 탈출구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밤에 공부할 수 있다고 했던 곳은 산업체부설 야간고등학교를 말하는듯 했습니다.  


 

나는 그런 애환이 서린 건물 앞을 천천히 걸어갔습니다.



제일모직 본관건물은 기념관으로 리모델링했습니다.



나는 제일모직 기념관 건물 앞에 잠시 서있었습니다. 이 곳은 단순한 시멘트 덩어리가 아니라 우리나라 산업화의 역사가 서린 장소이기도 합니다.



마냥 옛생각에 잠겨 있을 수 없었기에 나는 북구청 방향으로 걸음을 빨리해서 걸었습니다.



타임캡슐을 묻어두었더군요.



삼성창조 캠퍼스에서는 도시재생 한마당 행사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제일모직 공간은 아름답게 재생시킨 멋진 사례가 될듯 합니다.

 



호암 이병철씨의 동상이 한켠에 서있었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이병철씨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1922년 지수보통학교 3학년에 입학, 같은 해 9월서울 수송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학하였다. 중동학교 속성과 1학년에 입학, 중학부에 들어갔다. 1929년 박두을(朴杜乙)과 혼인하였다. 1930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전문부 정경학과에 입학하여 수학중 심한 각기병으로 귀국하게 되어 학업을 중단했다.


사업에 뜻을 두고 아버지로부터 300석 추수의 토지를 분재받았다. 1936년 첫사업으로 정현용(鄭鉉庸)·박정원(朴正源)과 동업으로 마산에서 협동정미소를 운영했다. 같은 해 6월 일본인 경영의 히노데자동차회사[日出自動車會社]를 인수했으며, 또한 토지에 투자하여 200만 평의 대지주로 등장했으나 실패하고, 협동정미소와 히노데자동차회사를 매각, 부채를 청산했다. 1938년대구에서 삼성상회(三星商會)를 설립, 1941년 주식회사로 개편, 청과류와 어물 등을 중국에 수출하였다.



1942년 조선양조를 인수하였고, 1947년 상경하여 1948년삼성물산공사(三星物産公司)를 창설, 무역업에 착수하였다. 1950년 일본경제시찰단원으로 업계를 시찰하였고, 6·25전쟁 때 부산에서 삼성물산주식회사를 설립, 운영하였으며, 환도 후 본격적으로 사업에 착수하였다.


1953년부터 상업자본에서 탈피하여 제조업에 투자함으로써 산업자본화하였다. 같은 해 제일제당주식회사를 설립하기 시작하여, 1954년 제일모직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그 뒤 동방생명·신세계백화점·안국화재보험·전주제지·성균관대학교 등을 인수, 경영하였고, 중앙개발·고려병원·한국비료·삼성전자·제일합섬·삼성중공업·동양방송·중앙일보사 등을 창설, 운영하였으며, 삼성문화재단·삼성사회복지재단 등을 설립하여 이사장에 취임하는 등 많은 회사를 설립, 인수 또는 합병하여 재벌기업을 형성하였다.



또한,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전신인 전국경제인협회를 창설하여 초대 회장에 취임했으며, 울산공업단지를 조성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1987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출처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44415




삼성상회 본관건물을 옮겨와서 재생시켜두었더군요.



1994년 배낭을 메고 처음으로 필리핀을 갔을때 우리나라 금성 텔레비전과 삼성 이코노 텔레비전이 일본의 고급 텔레비전에 밀려 전자대리점 뒤편 구석에 먼지를 덮어쓰고 쳐박혀 있는 것을 보고 얼마나 실망했는지 모릅니다. 금성사는 오늘날의 LG입니다.



나는 우리나라 전자회사들이 일본의 소니마쓰시다같은 회사를 따라잡고 이겨낼 수 있는 날은 영원히 오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대구 오페라하우스 건물이 등장했습니다.



지방도시에 오페라 하우스가 서는 것도 상상을 못하고 살았습니다.



다른 글에서도 이야기한 사실이 있습니다만 우리 세대는 정치 경제면에서 인류 역사 오천년을 압축해서 경험한,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사람들입니다.



경제적으로는 전쟁의 폐허 속에서 고통받으며, 지지리도 못살고 가난한 농업국가가 산업사회로 변하는 모습을 보았으며 더 나아가 정보화사회로 변하는 현상을 직접 체험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일인독재국가에서 군사독재국가로 더 나아가 민주화 투쟁과 민주주의 구현이라는 현상까지 목격했으니 정말 다양한 변화를 체험하며 살아온 세대입니다. 마지막에는 촛불 들고 일어나 무능하고 어리석은 지도자와 정권을 평화적인 방법으로 교체시키며 탄핵까지 했으니 경험할건 거의 다 경험한 셈입니다.



지방자치제도가 도입된 뒤 시가지 정비를 정말 깔끔하게 잘해두었습니다.



대구! 정말 많이 변한 도시입니다.



이제 조금만 더가면 될듯 합니다.



남침산 네거리를 지났습니다.



예전에는 이쪽으로 거의 다 공장지대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DGB대구은행 건물 앞을 지나치게 됩니다.



나는 대구은행에서 발행하는 '향토와 문화'라는 잡지를 정말 높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사방에 가을 기운이 가득했습니다.



걷기 시작한지 삼십여분이 거의 되어가는듯 합니다. 거의 다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