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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18 일본 자전거 여행-간사이(完)

옛 궁궐터 헤이조쿄를 살펴보다

by 깜쌤 2018. 9. 24.


서대사역을 통과하고 지하통로를 거쳐나오자 부근에 헤이조쿄 유적지가 등장했다. 서대사라는 절이 있다면 당연히 동대사도 있어야하고 실제로도 존재한다. 나라를 대표하는 절은 누가 뭐래도 도다이지라고 발음하는 동대사다.


일본에서 이런 구닥다리 버스 정류장을 보는 것은 처음이다. 전통에 충실한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이런 것을 남겨두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마침내 헤이조쿄의 입구까지 왔다. 헤이조쿄라는 일본식 발음이 마음에 들지 않는 분들을 위해 한자식으로 옮겨드리면 평성경(平城京)이 된다.



우리는 자전거를 타고 안으로 들어가 평성경 자료관 부근 주차장에 자전거를 세웠다. 그리고는 자료관부터 훑어보기로 했다.



자료관 부근의 매점에서 커피 한 캔을 샀다. 피로했기에 조금씩 원두 커피를 홀짝거리며 피로회복제로 쓰기 위해서였다.



저 멀리 동쪽으로 나라를 대표하는 동대사 부근의 산들이 보인다. 헤이조쿄 유적지의 넓이는 정말 광활하고 크다.



정신을 차리고 사방을 보다가 헤이안쿄의 유적중에서 대극전이라는 건물을 찾아냈다.



거기부터 보기로 했다. 자전거를 타고 들어가도 되는데 그걸 모르고 걸어갔다.



유적지의 규모가 엄청 넓고 크기 때문에 구역 안에서 자전거를 사용해서 돌아다니는 것을 허락하는 모양이다. 특별히 허락받은 귀빈이면 몰라도 승용차들은 곤란하다.  




이쯤에서 구글 위성지도를 보기로 하자. 위의 지도를 클릭하면 새창으로 크게 뜰 것이다. 분홍색 점들은 나라 궁터 인근의 전방후원분을 나타낸다. 가만히 보면 나라 인근에는 그런 모양의 무덤들이 즐비함을 알 수 있다. 전방후원분을 실제 현장에서 만나보면, 그 크기를 경주시내의 고분군과 비교해볼때 경주에 산재한 봉우리같은 고분들조차 아이들 장난감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평야 한가운데 거대한 기와집 건물이 불쑥 솟아오른것처럼 보인다.



헤이죠쿄는 당시 일본인들의 눈에 유일한 선진 국제도시였던 당나라의 수도 장안(오늘날 섬서성의 서안)을 흉내내어 건설된 도시다.  



삼국지에도 등장하는 낙양은 오늘날의 뤄양으로서 하남성(=허난성)에 있다. 






 삼국지에도 등장하는 낙양(=뤄양)은 후한 말기 한때 수도를 옮겨가서, 일시적이나마 황제가 살던 으뜸가는 도시 구실을 했던 도시다. 그 후 낙양은 중국 역사에 등장하는 숱한 왕조의 수도로 사용되었었다. 오늘날에는 하남성의 중심도시인 정주에 밀리는 분위기다.  



다시 정리하자. 일본 나라에 있는 평성경(=헤이안쿄)는 낙양을 흉내낸 도시가 아니라 장안을 모방한 도시라는 것이다.



나라는 한때 일본 고대사에서 수도 구실을 했었다.



수도로 사용될 때 바로 여기 이땅에 왕궁이 있었다. 왕궁의 정전으로 쓰인 건물이 대극전이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일본 고대사에서는 수도를 자주 옮겨다녔다는 것이다. 왕이 죽어도 옮기고 무슨 큰 사건이 생겨서 옮기기도 했다.



그래서 저번에 우리가 방문했던 아스카에도 잠시 수도를 정해 머물기도 했고 오늘날의 오사카 중심부 속에 있는 난바로 한때 천도하기도 했다. 신사이바시난바라면 오사카를 대표하는 관광지이기도 하다.


 

천재학습백과에서는 헤이조쿄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었다.


헤이조쿄는 일본 나라 시대에 710년부터 740년까지, 745년부터 784년까지 수도였다. 헤이조쿄는 당의 장안성을 모델로 하여 건축하였기 때문에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 큰 도로인 주작대로와 주작대로를 중심으로 좌우에 많은 도로와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 비슷하다.



710년 겐메이 왕이 나라로 천도한 때부터 794년 간무 왕이 헤이안쿄로 천도할 때까지를 나라 시대라고 한다. 660년 멸망한 백제의 부흥 운동을 도왔다가 신라와 당에 패배하고 백제의 지배 계층이 유입되었다. 그 결과 7세기 후반 한자 문화권에 본격적으로 흡수되었고, 중국식 법체계, 사회 제도를 수용하여 8세기 초에는 고대 율령 국가 체제가 완성되었다.



중국 수와 당, 한반도의 신라, 발해 등과 교류하여 많은 문화를 수용하였다. 나라 시대에는 당의 장안을 모델로 하여 율령 정치를 실시하였고, 장안성을 모방하여 계획 도시인 헤이조쿄를 설립하였다. 하지만 당이 755년부터 763년에 걸쳐 안사의 난으로 인해 쇠퇴하자, 794년 간무 왕이 헤이안쿄로 천도하여 헤이안 시대를 열었다.


글의 출처 :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24XXXXX88731



헤이조쿄의 생김새에 대해 설명해둔 것을 인용했는데 얼마나 이해가 될지 모르겠다. 다시 아래 그림을 보기로 하자.

                                   




천재학습백과에서는 헤이조쿄의 생김새를 위 그림처럼 설명하고 있었다. 동대사와 서대사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고 외경이라는 말도 등장한다. 알아두면 좋은 낱말이기도 하다. 쇼소인은 우리가 잘 아는 정창원을 의미한다.



대극전이라는 이름을 가진 저 건물은 복원한 것이다.



앞쪽으로는 출입하는 것이 제한되어 있었다.



대극전 앞 저멀리 보이는 현대식 건물은 발굴된 유물을 처리하는 곳이라고 한다.



우리는 건물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갔다.



출입구는 뒤쪽으로 나있었다.



우리는 뒤에서부터 접근해서 계단을 올라갔다.



안으로 들어서자 널찍한 공간이 나타났다.



안내도를 보면 궁성이 차지고 있던 면적이 굉장했었음을 알 수 있다. 궁궐로 사용했던 헤이조궁(=평성궁)만 해도 동서 1.3킬로미터, 남북 1킬로미터였다는데 이는 오늘날 조선의 정궁으로 남아있는 경복궁 면적의 약 3배라고 한다.



궁궐의 정문은 남대문이다. 북쪽 끝에 궁궐을 짓고 남대문에서부터 도성의 남문(궁궐의 남문이 아니다)에 해당하는 나성문(羅城門)까지 너비 75 미터의 주작대로를 만들었다. 주작대로의 좌측을 좌경(左京)이라고 하고 오른쪽을 우경이라고 했다. 


 

대극전 안 한가운데에는 왕이 앉는 어좌를 배치했다.



나는 잠시 고개를 돌려 밖을 보았다. 멀리 타워 크레인 너머 남대문이 보인다.



우리 시대의 석학 이어령씨는 일본문화를 두고 축소지향이라고 정의했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건축에 있어서는 축소지향과는 다른 개념을 적용해야하지 않을까싶다.



저 앞에 보이는 남대문 너머로 도성이 펼쳐진다. 도성의 동서 길이는 4.3킬로미터, 남북 4.7킬로미터였다니 대단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중앙에 남북을 관통하는 주작대로를 두었다고 했다. 동서로도 반듯하게 길을 내었는데 그게 영어로 치자면 뉴욕 맨하탄의 스트리트에 해당한다. 일본인들은 동서로 낸 거리를 조( 곁가지 조)라고 불렀는데 9조까지 두었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거의 그대로 남아있다. 멀리 나라 시가지가 보인다.  


  

어좌는 화려했다. 물론 복원한 모형품이다.



대극전 건물 지붕  양쪽 끝에는 우리나라의 치미 비슷한 장식물을 올렸고, 건물 지붕 가운데에도 장식물을 설치했는데 그게 바로 이런 모습이다. 



나는 일본인들이 만들어낸 옛 도성을 보고 내가 평소에 짐작하고 상상했던 그 어떤 이미지와는 전혀 딴판임을 깨달았다. 


 

남북으로도 길을 반듯하게 냈다. 그게 방( 동네 방)이다.



주작대로를 가운데두고 동쪽에 4개방, 서쪽에 4개방을 두었다고 한다. 방은 맨하탄의 남북을 잇는 길을 나타내는 애비뉴 개념과 비슷하다.  



우리는 대극전 건물을 한바퀴 돌았다.



한바퀴 돌아서 앞쪽으로 나왔다.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지금 우리가 보고있는 것은 제 1차 대극전 터 위에 복원한 건물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제 2차, 제 3차 대극전 건물터도 있어야한다. 그런 사실은 발굴작업을 통해 확인해나가는 중이다. 대극전 지붕위에 올려둔 치미와 중앙장식물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남대문으로 가보는 것은 생략하기로 했다. 우리는 자전거를 세워둔 곳을 향해 걸었다.



멀리 남대문이 보이고 그 앞으로 기차가 지나갔다.



규모의 크기에 질린 나는 입을 다물고 천천히 걸었다.



유적을 세밀하게 발굴하고 하나씩 복원해나가는 일본인들을 보며 느낀 점이 많았다.



지금 우리 세대는 후손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쳐질까?



젊은이들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이야기지만 우리는 경제개발과 민주화를 위해 매진했던 세대다.



인류 5천년 역사 전체를 압축해서 한 세대만에 모조리 다 경험해본 전세계 유일의 세대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는 일본인들도 우리 세대를 따라올 수 없다. 자랑스런 우리 세대 구성원조차 지금은 도매금으로 한꺼번에 넘어가 꼰대취급을 받는 중이다.





어리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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