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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깜쌤의 세상사는 이야기 : '난 젊어봤다' - 자유 배낭여행, 교육, 휘게 hygge, 믿음, 그리고 Cogito, Facio ergo s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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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안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나라안 여기저기 in Korea

제주도 - 동쪽 해변탐방 2

by 깜쌤 2018. 8. 29.


종달리 마을이 가까워지는 모양이다.



마을 쉼터가 나타날 때마다 쉬어가기로 했다. 성산 일출봉이 차츰 멀어지고 있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귀하다는 오징어를 널어말리고 있었다. 귀한 수산물을 이렇게 널어둘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이 순박하다는 의미다. 


 

혹시 수입산 냉동 오징어는 아닐까?



바다가 바로 보이는 곳곳에 펜션이나 빌라들이 자리잡았다.



나는 해안선이 곱게 이어진 길을 따라 달린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치다가 젊은이들이 운영하는 샌드위치 가게를 발견했다.



그냥 지나치려다가 자전거를 돌려 찾아가보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금액보다 많이 비싸서 들어가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젊은이들과 나는 씀씀이가 다르다.



해양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을 만났다. 젊음이라는 것은 역시 좋은 것이다. 새로운 것에 도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이 들어서 새로운 것에 도전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체력이나 기능을 많이 필요로 하는 것은 어려움을 느낀다.



지미봉 앞을 지났다. 생김새로 보아서는 오름 같은데....



나는 요즘 시골에 자그마한 집을 하나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산다. 봄부터 가을까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그런 집 말이다.  



종달리 인근 두문포에서도 우도로 가는 배가 있는 모양이다. 그런 사실은 처음 알았다.



바닷가 바위에서 치성을 드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부근에 안내판이 서있기에 확인해보았더니 돈짓당이었다.



네이버 어학사전에서는 돈짓당을 아래와같이 설명하고 있었다.


제주도 민간신앙의 하나로 어부, 해녀, 어선 등 해상의 일들을 관장하여 수호하는 신을 섬기는 당을 일컫는다.



사정없이 내려쪼이는 햇살을 고스란히 온몸으로 받으며 힘겹게(?) 버텨내는 엄마소와 송아지를 보고있으려니 마음이 아파왔다. 소들도 인간처럼 햇살을 뜨거워할 것이다. 엄마소는 발을 죽통에 담그고 있었다.



도로가에는 제주도 민간 신앙의 흔적을 소개해주는 안내판이 자주 서있었다.



섬이라는 특성상 육지와는 다른 민간신앙이 번성해 왔으리라.



커다란 만처럼 보이는 우묵한 지형이 나타났다.



하도 해수욕장 부근이다.



육지속으로 들어온 해수욕장 바로 앞 바다에는 해초들이 자라고 있었다.


 

민물과 바닷물이 마주치는 부근으로 도로가 나있다.



호수처럼 보이는 곳을 두고 용목개와당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듯하다.



하도해수욕장은 바다물 깊이가 얕은것 같다.



해수욕장의 길이도 제법 길어서 보기에도 좋다.



길은 해변으로 이어져있었다. 나는 꾸준히 북동쪽을 향해 달렸다. 



토끼섬이 오른쪽으로 나타났다. 섬은 육지에서 그리 멀지 않다.



바닷가 작은 풀밭에는 피크닉을 나온 젊은이들이 여기저기 자리잡고 앉아서 청춘이 주는 특권을 구가하고 있었다.



내가 젊었을땐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모습이다. 1955년작 영화 <피크닉>이 생각났다. 윌리엄 홀든킴 노박이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옛날 영화다. 젊은이들이 들고 온 피크닉 가방이 나로 하여금 아련한 기분에 젖어들게 만들었다.



도로가에서 중국집을 발견했다.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는 주제에 레스토랑에서 혼자서 음식을 먹는 것이 너무 사치스럽게 느껴졌기에 서민들이 드나드는데 부담이 없는 중국집에 들어갔던 것이다.  



저만치 토끼섬이 보인다. 토끼섬은 문주란의 자생지로도 유명하다.



짬뽕을 주문해서 밖에 마련해둔 탁자딸린 의자에 앉아 먹었다. 차가운 에어컨 바람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부부가 나란히 올레길을 걷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보기좋았다.



그분들은 꾸준히 걷고 있었다. 나중에 몇번 더 마주쳤다.



돌로 잘 쌓은 성벽이 나타났다.



별방진이었다. 성벽 앞에 맑은 물이 솟아나는 샘이 있었다. 아이들이 몰려와서 한참을 재잘거리고 갔다.



별방진이라는 처음 듣는 유적이었다. 검색을 해보았다.


제주도 기념물 제24호. 1510년(중종 5) 제주목사(使) 장림()이 김녕방호소()를 이곳으로 옮겨 다시 축성()한 것이다. 그 이유는 우도() 부근에 빈번히 출몰하는 왜구를 효과적으로 막기 위한 것이었다. 성의 규모는 둘레 2,390척(약 72㎞), 높이 7척(약 2.1m)이었으며, 1848년(헌종 14) 목사 장인식()이 중수하였다.


동·서·남 3문 및 문 위에는 초루가 있었으며, 성의 형태는 동서의 길이가 긴 타원형으로 전체적인 지형은 남고북저()였다. 성안에는 진사()·객사()·군기고()·별창()·대변청() 등의 시설물이 있었으며, 병력으로 책임자인 조방장() 1인을 비롯하여 치총()·성정군()·방군()·방포수()·궁인()·시인()·봉군() 등이 배치되어 있었다.



1907년 군기고 혁파 이후 점차 성이 파괴되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하도리 포구 공사로 북쪽 성렬이 모두 파괴되고 말았다. 현재 동·서·남쪽 성벽 일부가 남아 있다. 1974년 4월 12일에 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별방진 [別防鎭]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별방진 안쪽은 마을이었다. 나는 성문이라고 짐작되는 곳에 서서 바닷가를 살펴보았다.


 

깔끔하게 손을 본 하도리 작은 포구가 너무 정겨웠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