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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18 일본 자전거 여행-간사이(完)

아스카 - 석무대와 아스카사

by 깜쌤 2018. 8. 3.


석무대(石舞臺 부타이)는 어찌보면 아스카 탐방의 핵심지라고도 볼 수 있다. 아래 지도에서 7번이 석무대의 위치를 나타낸다.




1. 편의점 위치

2. 아스카 게스트하우스 - 우리가 하루 묵었던 곳 

3. 아마카시 언덕 전망대

4. 아스카사 -일본 최초의 절

5. 주선석(酒船石) - 일본판 포석정(?)

6. 아스카 나무지붕 궁터 - 소가씨를 제거한 을사의 변 당시의 궁터일 가능성이 높은 곳

7. 석무대(石舞臺 이시부타이) - 소가노 우마코의 무덤이라고 전해지는 곳

8. 귤사-쇼토쿠태자 탄생지

9. 천무, 지통 일왕릉

10. 흠명왕릉 -전형적인 전방후원릉

11. 아스카 기차역

12. 다카마쓰 고분-고구려풍의 벽화들이 쏟아져나와 일본인과 역사학자들이 기절초풍한 무덤


위 지도를 클릭하면 더 크게 나타날 것이다. 확대해두고 살펴보면 이해하기가 더 쉬울 것이라고 본다.



자전거를 세워두고 조금 걸어올라갔다.



입장권을 사서 안으로 들어갔다.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조용한 산 중턱에 석무대가 자리잡고 있었다. 


 

바로 저기다. 커다란 바위들이 모여있는 곳이다.


 

계단을 걸어서 올라가보았다.



일본서기의 기록에 의하면 일본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서기 552년의 일이다. 백제의 성왕노리사치계라는 승려에게 불경과 불상같은 것을 들려 왜국에 파견한 것이 불교전래의 시초라고 알려져 있다.


  

불교가 처음부터 순순히 일본인들에게 전해진 것은 아니다. 야마토 정권의 조정에서는 불교를 받아들여야한다는 숭불파와,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는 배불파로 나뉘어져 다툼이 일어나는데 숭불파를 이끈 대표적인 인물이 도래인의 후손이라고 알려진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였다.


 

배불파의 우두머리는 토착세력을 대표하는 모노노베씨였다.



이 양파의 싸움에서 승리한 사람이 숭불파인 소가노 우마코다. 


 

석무대 이시부타이는 소가노 우마코의 무덤으로 알려져있다. 그게 통설이다.



무덤이 내부까지 이렇게 홀랑 까뒤집혀서 공개되는 것은 정말 보기드문 일이 아니던가?



지붕구실을 하는 것은 집채만한 바위덩어리 두개다. 이 바위들을 멀리서보면 두 덩어리가 머리를 맞대고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석무대石舞台라고 한단다.



소가씨는 한동안 권세를 휘두르며 잘 살았지만 그의 자손대에서는 드디어 권력투쟁에서 패배하여 밀려나고 만다. 소가씨에게 원한을 가졌던 사람들이 무덤의 봉분을 싹싹 긁어내어 이렇게 훼파되고 말았다고 전해진다는데......



그런 사연을 알고보면 권력이라는게 지극히 무상함을 알 수 있다.



석실 안에는 물길까지 나있을 정도로 습기가 가득했다. 석실 한변의 길이는 약 7.7미터 정도이고 폭은 3.5 미터 정도다.



원래 무덤은 한변의 길이가 50미터 정도가 되는 네모난 무덤이었다고 한다.



이런 무덤을 축조하는데는 도래인들의 기술지원이 한몫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도래인들은 주로 백제에서 건너간 사람들이다.



석실로 이어지는 무덤길(연도)은 11미터정도라고 한다.



먼산에서 뻐꾸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무덤은 오래전에 도굴되어서 시신조차 남아있지 않았다고 한다. 권세를 잡고 영화를 누렸던 사람은 사라지고 이제는 무덤 하나만 달랑 남았다. 



역사학자들의 의견에 의하면 소가노 우마코의 고조 할아버지가 되는 소가노마치(蘇我滿智 소아만지)는 백제의 대신이었던 목만치(木滿致) 혹은 만치(木刕滿致)일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소가씨가 도래인의 후손이라는 것은 거의 정설이다.



그런 사실을 애써 믿고 싶어하는 일본인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이시부타이를 보고 나온 우리들은 게스트하우스가 있는 아스카 마을쪽으로 달려내려갔다.



만엽기념관 앞을 지났다. 시간이 급박하니 들어가볼 여유가 없었다. 아스카 마을 곳곳에는 만엽이라는 고유명사가 자주 등장한다. 위키 백과에서는 만엽집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었다.


만엽집(万葉集 (まんようしゅう))는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후반에 걸쳐서 만들어진 책이며, 일본에 현존하는 고대 일본의 가집(歌集)이다. 일본어의 한자가 신자체화 되기 전에 쓰인 책이기 때문에 원래 표기는 '萬葉集'이지만, 신자체화 뒤로는 '万葉集'이라고 쓰고 있다.


이 책의 성립은 서기 759 이전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일본 천황, 귀족부터 잘 알려지지 않은 신분의 사람까지, 여러 신분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읊은 노래를 4,500개 이상 모은 것이다. 나라 시대의 중국식 문화 유행기의 일본의 전통적 예술작품이다. 구성·가제(歌題)·가형(歌形) 등에 중국 문화사상의 영향이 보인다.




만엽집이라는 책 이름은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보았으리라.



고대 일본의 노래집이니만큼 역사적인 가치는 충분하다. 만엽집에 들어있는 노래의 배경이 되는 장소가 이 일대라는 것이 흥미롭다.



우리는 주선석(酒船石)을 찾아나섰다.



주선석이 있는 곳으로 올라가는 길 부근은 대나무로 가득했다.



넓적하게 생긴 큰 바위덩어리가 대나무 숲속에 모습을 드러냈다.



할아버지 한분이 일본 아이들에게 열심히 무엇인가를 설명해주고 있었다.



바위 위에는 무엇인가를 조각한 흔적이 있다.



누가 의도적으로 새긴 것이다.



경주에 있는 포석정을 떠올리게 했다.



어떤 이는 술을 담글때 쓰던 돌이라고 해서 주선석(酒船石 사카후네이시)이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약과 기름을 만드는 도구였다고도 주장한다. 단순히 정원에 설치하기 위해 다듬었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는 형편이니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 수 없는 유적이다.



이번에는 구형석조물(龜形石造物)을 찾아나섰다. 



바로 곁에 두고 뺑뺑 돌았다. 주선석으로 올라가는 길 부근에 있으니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다.  



표를 샀다.



골짜기 안으로 조금만 걸어들어가면 된다.



일왕 내외도 여길 다녀갔단다.



구형석조물이 있는 공간은 발굴 중이었다.



낮은 울타리안에 거북이 모양을 닮은 돌확처럼 생긴 석조물이 놓여있었다.



돌담장 안에 돌을 소복하게 깔고 구조물을 배치를 한 것을 보면 나름대로 상당한 의미를 두었던 것 같다.



부근은 온통 대나무 숲이다. 나는 여기에서도 포석정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제 마지막 행선지를 찾아나서야한다.



그게 아스카 절이다.



아스카 절은 우리가 묵었던 게스트하우스 인근에 있다.



쉽게 찾았다.



아스카 절이다.



옛날 절의 모습은 거의 다 사라지고 지금은 건물 몇채만 남아있었다.



서기 596년 도래인계의 후손이었던 소가노 우마코는 절을 완성시키고 이름을 법흥사라고 한 뒤 불상을 안치했다. 그 절이 오늘날의 아스카사다.


 

공사기간은 8년이었다고 한다. 건축을 담당한 사람들은 모두 백제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일본 최초의 절이라는 의미외에도 개인이 만든 절이라는 의미가 깃들여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나라에서 절을 만들면 관사(官寺), 왕이 주도하여 세웠다면 왕사()가 되지만 한 가문이나 개인이 세웠다면 씨사(가 된다. 아스카사는 씨사이자 일본 최초의 절이다. 일본 최초의 기와집이라는 말도 있다.



우리는 의자에 앉아 땀을 식혔다. 관람객들이 끊임없이 몰려왔다가 빠져나갔다. 어떤 이들은 종루에 올라가서 종을 쳐보기도 했다. 물론 돈을 내어야만 가능하다.



지금은 초라하게 남아있지만 처음 건축할 때는 사방 200미터 정도의 크기였다고하니 어마어마한 위세를 자랑했던 모양이다. 일본 열도 최초로 불교라는 종교가 날개를 달고 날아올랐던 절이 아스카사였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