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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깜쌤의 세상사는 이야기 : '난 젊어봤다' - 자유 배낭여행, 교육, 휘게 hygge, 믿음, 그리고 Cogito, Facio ergo sum
  • 인생 - 그리 허무한게 아니었어요. 살만했어요
우리나라 안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나라안 여기저기 in Korea

위천 라이딩 3

by 깜쌤 2018. 7. 31.


모두 다 모였길래 쇠고기를 먹기로 했다. 아래층 식육점에서 고기를 사들고 위층으로 올라가서 구워먹는 그런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소고기와 쇠고기, 무엇이 맞는 말일까? 현재는 두개다 표준말로 인정받고 있다. 고기를 먹은 뒤에 소면을 먹었다. 결국 과식을 해버린 셈이다.  



손 위 동서집에서 모이기로 했기에 나는 혼자서 자전거를 타고 다시 출발했다.



손위 동서는 의성에 살고 있으니 행정구역상으로 의성군까지 다시 넘어가야했다.



나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로 했다. 혼자서 달리는 것이다. 사랑교 앞을 지났다.



위천 천방둑을 자전거 도로로 만든 것이니만큼 그런대로 신경을 쓴 흔적이 보인다.


 

아까 보았던 보가 다시 나타났다. 보가 은근히 높아 보이길래 걱정이 되었다. 물고기가 뛰어 오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내가 군위군 우보에서 시간을 보낸 것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계산해서 딱 십년간이다. 


   

청년기 이후로는 직장생할을 하느라고 거길 떠났지만 부모님이 살고 계셨길래 그후로도 거의 40년간을 더 드나들었다.


 

우리집이 있던 마을은 아주 작은 동네였다. 그러니 아는 친구도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초등학교를 그곳에서 나오지 않았으니 부모님이 계시는 시골집에 가봐도 아는 친구가 있을리가 없었다.



그게 내 인생의 작은 비극이기도 했다.



어머니 입장에서 보면 친정이자 고향이고 아버지 입장에서도 고향과 가까우니 낯선 곳이 아니었지만 내 처지에서는 살긴 오래 살았어도 영원한 타향일 수밖에 없는 묘한 곳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산천은 눈에 익었지만 정이 붙지 않는 곳이 되어버렸다.



나는 묵묵히 위천가를 따라가며 페달을 밟았다.



아내가 살았던 동네를 멀리서 바라보며 지나쳤다.



이젠 이 모든 장소가 다 점점 더 낯선 곳으로 변해가는 중이다.



범죄없는 마을이라면 대단한 기록이다.



내 외가와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부모님을 다 여의고나니 외가도 찾아갈 일이 없게 되었다.



작은 고개를 넘어가자 행정구역이 바뀌었다.



드디어 의성군으로 넘어갔다.



스마트폰으로 손윗동서의 집 주소를 받아 정확하게 찾아갈 수 있었다.



음료수를 마시며 환담을 나누다가 4시 반경에 일어났다.



손아래 동서가 영천 기차역까지  태워주었다. 영천에서 경주로  가는 기차는 매시간마다 있으니 편리하다.



자전거를 접어서 기차에 실었다. 군위군을 관통하는 위천 라이딩은 그렇게 끝을 맺었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