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깜쌤의 세상사는 이야기 : '난 젊어봤다' - 자유 배낭여행, 초등교육, 휘게 hygge, 믿음, 그리고 Cogito, Facio ergo sum
  • 인생 - 그리 허무한게 아니었어요. 살만했어요
우리나라 안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나라안 여기저기 in Korea

영덕의 봄 7

by 깜쌤 2018. 5. 12.


산밑으로 단정한 기와집들이 열지어 자리잡았다.



괴시마을 이름의 유래에 목은 이색선생이 등장한다. 그리고 구양현이라는 중국인이 등장했다. 나는 궁금증이 일었다. 구양현은 누구며 괴시마을은 중국 어디쯤에 있는가 싶었다.  



그래서 중국판 구글이라 할 수 있는 바이두에 찾아가서 구양현이라는 인물을 검색해보았다. 괴시마을 안내판에 등장하는 구양현이라는 인물이 분명히 존재했다. 이색의 생몰연대와 비슷한 시기에 살긴 살았다.   



欧阳玄

欧阳玄(1274年—1358年2月7日),字元功,号圭斋,祖籍分宜县防里村,后迁湖南浏阳(今湖南省),为欧阳殊之后裔 [1]  ,元代史学家、文学家。延祐年间(1314年—1320年),欧阳玄任芜湖县尹三年,不畏权贵,清理积案,严正执法,注重发展农业,深得百姓拥戴,有“教化大行,飞蝗不入境”之誉。


구양현은 원나라시대의 역사가였으며 문학가였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그는 오늘날의 강서성 신여시 분의현 방리촌 사람이었다.


오늘날의 영해 괴시마을은 영양남씨 집성촌이다. 그렇다면 중국쪽은 어떨까?




防里村位于江西省新余市分宜县钤山镇,地处分宜县最南端,

防里古樟林
防里古樟林(7张)

与安福县接壤。村落至今已有1670年历史,现今村中共有900多名村民,除杨姓村民170人外,其余基本上都姓欧阳,其它姓村民只有少数几户。在历史长河中,防里村在唐、宋、元、明、清年间,村中共考取19名进士,是个名副其实的“进士村”。


방리촌은 아주 오래된 마을로서 구양이라는 복성을 가진 이들이 모여사는 마을인 것은 확실하다. 그 어렵다는 과거에 진사이상 합격자가 19명이나 나왔기에 진사촌이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했다. 문제는 괴시라는 마을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괴시(槐市)라는 검색어를 가지고 바이두에 접속해보았다. 그랬더니 그런 마을 이름이 등장하긴 했다. 하지만 바이두를 아무리 검색해보아도 괴시마을과 구양현과의 상관관계는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陕西省华阴市的槐市


槐市,在华山峪东牛心峪。史载杨震父杨宝博学多才,潜心学问,为躲避朝廷征诏常远走他乡,隐居授徒。杨震为了供养家庭、侍奉老母,只好就近于牛心峪设馆讲学。由于震少而好学,博览群经,学子从者如市。当时学馆周围广植槐树,故当地人称讲学处为槐市


섬서성 화산부근에 괴시라는 곳이 있는 모양이지만 구양현이라는 인물과의 관계는 거의 없는 것 같다. 나는 이쯤에서 추적을 멈추었다. 어쩌면 괴시라는 마을은 오래전 이름일 수도 있겠다. 바이두 지도에서 신여시 방리촌 부근을 아무리 뒤져도 나오지 않았다. 그쯤 해두자.  



중국에 괴시 마을이 있으면 어떻고 없으면 어떠랴? 하지만 궁금증이 생기면 나는 기어이 찾아가봐야하는 사람이다.



위에서 언급한 강서성 신여시 부근에 도자기 생산으로 유명한 경덕진과 중국인들이 최고로 꼽는 시골 무원같은 마을이 존재한다. 물론 당연히 직접 찾아가서 눈으로 확인해보았으며 섬서성 화산에도 조금 올라가보았다.



우리 조상들이 중국을 대단하게 여겼다는 사실만은 틀림없다. 오늘날에도 중국이라면 기를 못쓰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어찌보면 그런 사람들은 소중화주의자들인지도 모른다.



북학을 연구했던 조선후기의 선각자중에서도 우리말을 포기하고 중국어를 쓰자고 주장한 얼빠진 학자도 있었으니 말 다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괴시마을에서 나는 평소 내가 꿈꾸었던 작은 기와집을 발견했다.



나는 밖에서 한참을 서성거렸다.



이러다가 기와집에 한번도 살아보지 못하고 죽을 것 같다.



그런 참한 집들이 소복하게 널려있었다.



나는 마음의 고향에 온듯한 착각에 빠졌다.



옛날에 지은 기와집들은 보기엔 좋아보여도 겨울엔 춥다.



골목은 황토 비슷한 것으로 잘 포장되어 있었다.



마당이 넓고 크다.



정감을 불러 일으키는 자전거 한대.....



이 집은 대문이 특이했다.



조금 열려진 대문 사이로 마당을 바라보았더니.....



조경이 잘되어 있었다. 농촌에서 살아도 이젠 탈곡을 마당에서 하는 법이 없으니 잔디밭으로 꾸며놓고 살 수 있는가보다.



가만히 보니 여긴 초가지붕을 가진 집이 거의 없었다.



모두가 부농이라는 말이다.



영해 들판이 너른 데다가 양반동네였으니 부촌이 되었으리라.



이 집은 아주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마당 안에 작은 흙담장을 쌓아서 남여의 활동공간을 구별해놓았다.



여기가 종가같다.



종손이 사는 집답게 깔끔하고 위풍당당했다.



척봐도 보통이 넘는 수준이다.



흙담장이 나타났다.



대부분의 집들은 서남향을 보는 구조였다. 


 

목은 이색선생 기념관으로 가보기로 했다.



거기를 보려면 마을의 나머지 절반은 포기해야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골짜기 속에 자리잡은 목은선생 기념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잘 손질해놓은 밭을 보면 마음이 푸근해진다.



흔히 볼 수 있는 시골집이지만 하나같이 깔끔했다.



지저분한 데가 없었다.



길이 약간 경사졌다. 하지만 힘드는 정도는 아니다.



황토를 바른 집이다. 회를 바르면 하얗게 보여 단정한 느낌을 주지만 이집은 황토로 마감한듯 하다.



마을이 끝나면서 길은 산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뒤돌아보았다. 골짜기 사이로 영해 너른 벌판이 고개를 들이밀고 있었다.



안내판이 나타났다. 이제 다온듯 했다.






어리

버리







'우리나라 안 여기저기 돌아다니기 > 나라안 여기저기 in Korea'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덕여행 후기   (0) 2018.05.14
영덕의 봄 8  (0) 2018.05.14
영덕의 봄 6 - 영해향교  (0) 2018.05.10
영덕의 봄 5  (0) 2018.05.08
영덕의 봄 4  (0) 2018.0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