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송대말 등대를 향해 걸었다.
바닷내음과 함께 솔바람 소리가 유난히 상쾌한 기분이 들도록 만들어주었다.
지도를 클릭하면 크게 뜬다. 송대말 등대의 위치를 단번에 확인할 수 있다.
등대가까이 접근하면 시야가 탁 터지면서 남북으로 이어진 해안을 한눈에 넣을 수 있다.
Daum 백과로 검색했더니 아래 글상자 내용이 떠올랐기에 한국관광공사의 '대한민국 구석구석'이라는 사이트에서 일부 내용을 가져왔다.
신라시대부터 경주의 동쪽 바다를 이용하여 일본과 교역을 하였다는 기록은 있으나 선박이 안전하게 접안하여 해상활동을 할 수 있는 곳은 당시의 해역 여건으로 볼 때 감포(甘浦) 일 것이다 .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감포는 경주에서 33Km 떨어져 있으며 , 송대말은 (松臺末) 감포항의 북쪽의 위치하는 곶으로 육지 끝에서 약 1000m 까지 암초들이 길게 뻗어 있어 작은 선박들의 사고가 빈번하였다 .
또한 먼바다에서 조업후 감포로 입항하는 선박이 쉽게 찾을 수 있는 지형이 송대말이다. 수령 300 년∼ 400 년 정도 소나무가 무성하여 지역에서 유일한 공원이며 , 일제시대부터 축양시설을 하여 바다에서 고기를 길렀으며 , 1919 년 어항으로 개항되었다.
연오랑세오녀 전설로 유명한 곳은 감포가 아니고 포항쪽이다.
수평선이 드러났다.
우리나라 전통양식을 본뜬 부속건물이 참하다.
감포항의 쇠락을 보면 마음 아프다.
대구 포항간 고속도로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그나마 제법 북적댔다.
버스가 도착하는 시장 인근에는 횟집들이 제법 많았다. 일부 횟집들의 횡포를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마음아파 할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일부 상인들의 몰지각한 모습을 볼 때마다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감포를 찾는 사람들 숫자가 정말 많이 줄었다.
요즘은 경주 황리단길이 제법 유명세를 탔다.
나는 은근히 걱정스럽다.
황남동과 사정동의 땅값과 집값이 감당없이 오르기 때문이다.
덩달아 세도 치솟고 있다.
그러다가 어느날부터 몰락이 시작될 것이다.
지구는 나혼자서 지키는게 아닌데도 쓸데없는 걱정부터 한다. 나는 그런 염려부터 해가며 전망대로 나아갔다.
시원스럽다. 암초에 부딪힌 물결들이 마구 부서지고 있었다.
바닷물이 퍼런 이유는 '하도 파도를 때려서 멍이 들었기 때문'이란다.
그런 이야기는 1970년대의 아재들 개그가운데 하나였다.
여기가 뷰포인트다.
나는 항구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내가 처음 감포를 갔을 때보다 확실히 많이 달라졌다.
그게 1970년대 말이었으리라.
그땐 바닷가에 접근하는 것부터가 어려웠다.
해안마다 해안 초소들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청년들이 플래카드를 걸고 갔다. 플래카드 제일 아래부분 글자가 눈에 확 들어왔다.
나는 동경주니 서경주니 하는 식으로 가르는게 너무 싫다. 경상도와 전라도로 편가르는 것도 정말 싫어한다.
진보니 보수니 해대며 싸우는 모습도 싫고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고 친박이니 잔박이니 해대는 꼴은 볼때마다 구역질이 날 정도다.
그런 구시대적인 악습은 바닷바람에 실어서 날려버리자.
모진 세파에 시달린 소나무는 아예 누워버렸다. 갈대나 억새같으면 다시 일어설 수나 있으련만.....
나는 씁쓸한 기분으로 천천히 돌아섰다.
표준말은 '어리바리하다' 것이지만 나는 글 말미에 항상 어리버리라는 경상도식 표현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그런 것도 모르느냐는 식으로 생각을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어리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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