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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16 북유럽,러시아-자작나무 천국(完

아르바트 거리 5 - 결투

by 깜쌤 2017. 9. 5.

 

당신이 대중앞에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이유없이 모욕을 당했다고 여길 경우 어떻게 처신해야할까?

 

 

원고 혹은 피고인으로 재판정에 섰는데 상대방으로부터 모욕적인 언사를 듣거나 상대방이 명백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확실할 때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유럽에서는 이런 경우 대개 결투를 통해 정의가 누구편인지를 판가름했다.

 

 

결투의 역사는 길고도 길다.

 

 

줄리어스 시저, 즉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게르만족 남자들은 칼을 가지고 결투하는 습관이 있다고 적었다고 하니, 결투는 기원전부터 행해진 관습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기사도 정신이 활짝 꽃핀 중세때부터 유럽에서는 결투의 바람이 불었다.

 

 

어떤 이는 자기 명예의 보존을 위해, 어떤 사람은 가족과 가문의 명예를 위해, 심지어는 자기가 진정한 친구임을 증명하기 위해 벗이 벌이는 결투에 함께 참가하기도 했다. 

 

 

이 박물관의 주인공이 되는 푸시킨도 아내와 자기 자신의 명예를 위해 결투에 나섰다. 

 

 

상대편이 대중 앞에서 자기를 모욕했다고 여길 경우 신사들은 장갑을 벗어 상대방 발 앞에 던졌다. 그러면서 결투를 신청한다고 외쳤다.

 

 

대부분의 경우 상대방은 장갑을 주워들었다. 결투를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말이다.

 

 

상대의 인격에 모욕을 가하고도 신청받은 결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에는 비겁자 대접을 받았다.

 

 

물론 비겁자는 평생 동네나 모임 혹은 지역사회에서 왕따 신세를 면치 못했다.

 

 

서양사회에서는 전쟁이 터질 경우 대부분의 남자들은 결연하게 일어나 전쟁터로 향했다. 안그럴 수도 있지만.....

 

 

지원하지 않는 남자들, 특히 총각들은 비겁자로 찍혀 마을 처녀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했다. 

 

 

그만큼 비겁자는 사회구성원들로부터 멸시와 차별을 받았다.

 

 

그런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기에 결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투에서 죽거나 다치면 하나님이 공정하게 심판하신 것으로 여겼다.

 

 

이런 사회에서는 강자가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결투하기로 합의되면 그 다음에는 무기를 정했다.

 

 

펜싱용 검으로 할 것인지 주먹으로 할 것인지, 피스톨로 할 것인지를 정했다.

 

 

장소와 시간도 당연히 합의하여 정했다.

 

 

그 뿐이랴? 입회인도 정했다.

 

 

사적인 결투일 경우 대개는 당사자의 친구들이 입회인으로 나섰다. 

 

 

 이제는 신사답게 깔끔하게 한판 붙어볼 일만 남았다.

 

 

국가에서 왕이 신하들에게 결투를 명령한 사례도 있었다.

 

 

어떨 땐 양쪽나라최고의 무장들이 나서서 결투를 해서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기사들이 말을 타고 벌인 마상(馬上) 창시합도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결투가 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스포츠 쪽으로 더 의미를 두기도 하지만 말이다. 

 

 

푸시킨의 부인은 처녀때부터 미인으로 소문난 여성이었다.

 

 

어떤 이들은 그녀가 당시 절대권력을 쥐고있던 황제와도 불륜관계에 있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사실 여부는 그녀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황제가 보기에는 푸시킨의 문학도 경우에 따라서는 반역성을 가지고 있다는 식으로 판단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음모론자들의 이야기를 빌린다면 일부 귀족들이 나서서 푸시킨이 결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될 지경으로 일을 꾸며나갔다고 한다.

 

 

결국 푸시킨은 명사수로 이름 높았던 기병장교 당테스와 권총 결투를 벌이게 된다.

 

 

서양사회에는 결투를 둘러싼 수많은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서부영화에 흔히 등장하는 보안관과 무법자들과의 싸움도 결투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그런 사례가 있다. 1881년 10월 26일 미국 서부 아리조나주 툼스톤의 OK목장에서 보안관과 무법자들 사이에 결투가 있었다.

 

 

푸시킨도 결투에 나갔다.

 

 

승패는 뻔했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비록 귀족가문 출신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는 시인이며 소설가였던 사람이다. 책상과 파티장에서 평생을 살아온 문학도였다.

 

 

나는 창가에 붙어서서 아르바트 거리에 서있는 푸시킨 부부의 동상을 살펴보았다.

 

 

결투를 앞둔 그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어떤 이들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장교였던 당테스는 푸시킨의 아내에게 대놓고 열렬하게 구애를 했다고 한다.

 

 

참으로 비극적인 일은 푸시킨과 결투를 벌인 당테스라는 프랑스계 망명 귀족은 푸시킨 부인의 여동생 이었던 에카테리나와 두달 전에 결혼했다는 사실이다.

 

 

누가 헛소문을 낸 것인지는 모르지만 일이 참으로 고약하게 꼬여들어갔던 셈이다.

 

 

푸시킨은 피스톨을 사용한 결투에서 복부관통상을 입었다고 한다. 

 

 

 심각한 부상으로 인해 사경을 헤매던 그는 결국 이틀 뒤에 숨졌다. 

 

 

 그가 결투를 신청했다고 했으니 할말이 없게 되었지만 어쨌거나 결과는 비극이었다.

 

 

당테스는 나중에 프랑스로 돌아가서 제법 장수하긴 했지만 쓸쓸하게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푸시킨은 일찍 죽은 대신 러시아인들의 가슴속에 깊이 자리잡았다. 이 사진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확실히는 모르겠다.

 

 

그의 초상화를 보면 그가 흑인피를 조금 이어받았음을 알 수 있다. 러시아의 근대문학은 그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라고 한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의 표본이 된듯한 느낌이 든다.

 

 

유품에 대한 설명이 영어로 되어있지 않아 너무 섭섭했다.

 

 

이 박물관 건물은 실제로 푸시킨이 모스크바에서 살았던 집이라고 전해진다. 그것도 신혼 시절에.....

 

 

귀족의 후예답게 평민들에 비해 상당히 유복하게 살았던 티가 골고루 묻어있다.

 

 

푸시킨은 개인 영지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다.

 

 

 요절했다는 사실만 뺀다면 그는 남이 가지지 못했던 것을 제법 많이 가졌던 사람이었다. 

 

 

 이런 수집품들은 어떻게 모은 것일까?

 

 

푸시킨! 그는 내 인생에도 작은 영향력을 남긴 사람이다. 그랬길래 나같은 어중이떠중이도 배낭매고 여기까지 흘러든게 아닐까?

 

 

나는 화장실까지 일부러 굳이 들어가서 확인하고 나왔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