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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살이/내가 만났던 하나님 Confess (간증)

(간증) 회심 4

by 깜쌤 2017. 8. 18.

목소리는 나오지 않지, 학교일이든 가정 일이든 건강문제든간에 하는 일마다 꼬이는데다가 정신적으로도 너무 괴롭기만 했기에 나는 어릴 적에 조금 알았던 하나님을 간절히 찾기 시작했습니다. 이 엄청난 고통과 괴로운 인생길에서 빠져나오게 해달라고 빌기 시작했었던 것이죠.

 

1987년 여름, 나는 집에서 가까운 황성공원 숲에 자주 찾아갔습니다. 황성공원에는 소나무와 꿀밤이 열리는 상수리나무같은 잡목들이 많이 자랍니다. 소나무가 자라는 구역은 한쪽으로 몰려있어서 나는 특정한 소나무 밑 시멘트 의자에 자주 찾아갔었습니다.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은 다시 한번 더 그 나무를 찾아보려고 해도 도저히 찾을 수 없게 되었더군요.

 

 

나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기적이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은 없었지만 무작정 기도를 했습니다. 청년시절에도 기도의 응답을 제법 많이 받은 적이 있었으니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은 받은 축에 들어갈 것입니다만 어디에서부터인가 인생살이가 꼬이기 시작했던 것이죠.

 

몸이 아팠으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병이 낫게 해달라는 기도를 특히 많이 했습니다. 온몸이 골고루 아파오는데는 도저히 견딜 재간이 없었기에 병이 낫도록 해달라고 많이 빌었습니다. 빈다고 하니까 옛날 우리 어머니들이 마당 한구석에 있는 장독대위에 정화수 한그릇 떠놓고 천지신명께 두손 비벼가며 비는 그런 모습과는 다릅니다. 나는 어렸을때 교화를 다녀본 경험이 있었기에 그해 여름에는 하나님께 정말 많이 기도드렸습니다.

 

내가 이렇게 극심한 영적인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아내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자세하게 이야기를 하면 나를 정신병 환자로 취급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아내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감추고 또 감추었습니다. 아내는 유년기나 학창시절에도 교회같은 곳으로는 전혀 발걸음을 옮겨보지 않은 사람이었으니 내가 하는 이야기를 도저히 이해해 줄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나 자신도 교회에 나가지 않은지가 십몇년이 넘었으니 교회에 다시 가서 기도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을뿐더러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해 여름에는 그저 시간날 때마다 소나무 밑 벤치에 가서 기도했던 것이죠. 사진 오른쪽을 자세히 보면 사람들 몇명이 앉아있는 것이 보일 겁니다. 그런 식으로 말이죠. 

 

1986년 가을, 경제적으로 많이 힘들었던 나는 포항제철(이제는 포스코라고 부릅니다만)에서 건립한 사립초등학교에서 교사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원서를 제출했습니다. 일반 공립학교보다 훨씬 더 나은 대우를 해준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고 시설이나 교육환경도 월등하게 좋다는 이야기를 제법 많이 듣고 있었습니다. 그런 학교에 가서 고급교육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지원을 했던 것이죠.

 

 

1차 서류심사에 쉽게 통과했기에 2차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면접장소까지 찾아가서 내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공교롭게도 그날은 대구에서 공무원 시험을 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면접장소까지 가서도 면접을 보느냐 마느냐 하는 것을 두고 마음속으로 깊은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선생을 하는 사람이 다른 공무원 시험을 본다는 것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당시의 저는 교직 생활이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이직 생각을 참 많이 했습니다. 저는 교직보다는 세무서나 외교부같은데서 근무하는 공무원이 되고 싶었습니다. 학창시절의 꿈은 대학강단에 서서 강의하는 것과 행정고시를 쳐서 고급관료 생활을 해보는 것이었습니다만 1986년 당시로는 실현 불가능한 아득한 꿈으로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초등학교 교사들은 군복무를 면제받는 대신 7년간은 반드시 의무복무를 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교직생활 7년을 채우지 않고 사표를 내고 이직을 하게 되면 반드시 현역으로 다시 입대를 해야만 했으니 꼼짝없이 붙들려 있어야만 했던 것이죠.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미발령 상태로 2년간의 세월을 날려버린 터라 나같은 사람은 9년간 복무를 해주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한창 공부하기에 좋았던 시절은 이제 사라져가고 있었습니다. 벌써 30대초반이 되었으니 꿈을 이루기엔 많이 늦어버렸지만 어쨌든 선생은 너무 하기가 싫었습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세무서나 검찰 같은 권력기관에 근무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은 동기가 너무나 불순했었습니다.

 

가난과 돈 때문에 하고 싶었던 공부도 못한데다가 그동안 너무나 고생을 많이 했기에 한탕 크게 해먹고(?) 그만두려는 생각이 앞섰던 것이죠. 지금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어리석은 생각이었지만 당시만 해도 사회 전반에 워낙 어두웠던 부분이 없지는 않았던터라 그런 허황한 꿈을 꾸었던 것이죠. 

 

 

돈없는 가난한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기에 동생들 공부를 시키기 위해 나는 내가 그렇게 가고 싶었던 대학에는 원서조차 내어보지도 못하고 꿈을 접어야만 했습니다. 1970년대 초반만해도 지방에는 입시경쟁이 치열한 대학들이 제법 있었습니다. 부산대학교나 경북대학교같은 곳에는 입학하기가 그리 만만치 않았는데 특히 인기있었던 학과 가운데 하나가 사범대학이었습니다. 졸업만 하면 중고등학교 교사로 곧바로 발령을 내어주던 시절이었으므로 시골의 가난한 집 수재들이 엄청 몰려들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그해 초겨울 어느날, 지방의 어느 교육대학 원서를 사들고 학교 교무실을 찾아갔더니 담임선생님은 그 기간동안 출장을 가시고 안계셨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때 담임선생님께서 우리반 학생들의 원서를 대신 써주고 계셨는데 제가 내밀었던 교육대학 원서를 보시고는 눈을 잠시 감으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 ○○야. 교육대학 원서는 내가 절대로 써줄 수가 없다. 너는 거기가면 네 인생을 망치게 된다. 지금 당장 대구로 가서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사회교육과 원서를 사가지고 오너라. 거기 지원하면 충분히 합격할 수 있다. 네 집안 형편은 짐작한다만 이 원서는 내가 써 줄 수 없다."

 

나는 지금도 그 순간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며오는듯한 아픔을 느낍니다. 고등학교 2학년때 담임교사로 저를 가르쳐주셨던 때 그 선생님께서는 학비가 적게 드는 국립 사범대학교 원서를 사오라며 간곡하게 저를 설득하셨습니다만 집안 형편을 잘 아는 저로서는 가장 빨리 직장생활을 할 수 있는 교육대학에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인생을 원대하게 생각할 줄 몰랐던 어리석은 시골뜨기의 선택이었고 또 시골생활에 젖은 제 부모님의 간절한 바람이기도 했습니다. 

 

 

1980년경 제가 경주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때 중고등학교 동기 한명이 시내 중학교에서 사회과 선생을 했기에 자주 만나 술도 한잔씩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한번은 그 친구가 이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야,  이 친구야. 고등학교 1학년 때 우리 둘이 교실에 남아서 담임선생님 일 도와드렸던 것 기억나는가?

"아니, 기억에 없는데...."

"자네와 내가 오후 늦게 교실에 남아서 생활기록부에 지능검사 결과를 숫자로 기록했던 적이 있었네. 선생님께서 눈코 뜰새없이 바쁘셔서 우리에게 그 일만 조금 부탁했었는데 그때 내 기억으로는 우리 반에서 자네 지능지수가 제일 높았다네. 그건 내가 확실히 기억하고 있지."

 

 

친구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나서야 나는 어렴풋이 그때 일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나름대로 알아주는 지방의 명문고등학교에서 1학년때는 우수반에 들어있으면서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전교 석차를 기록하고 있었기에 공부는 조금 한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도 교만이었지만 말입니다.

 

그 친구는 고2때 담임선생님이 권했던 바로 그 학과를 나와서 중학교에서 사회교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그는 교장까지 승진해서 교육지원청의 고급 간부로, 멋진 교육자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다 꿈같은 시절의 일이고 지나간 날들이지만 인생이 그런 식으로 꼬여버린 것을 생각하면 진한 회한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런 사연이 있었기에 아이들을 가르치면서도 늦게까지 교실에 남아 참으로 많이 공부를 했었습니다. 행정법, 행정학, 외교사, 헌법, 국사, 영어 같은 과목을 집중적으로 파고 들었는데 그런 과목은 외무행정직 시험에 필요한 과목이었습니다. 외국생활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외국에 나가서 못했던 공부를 마저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사립학교 면접을 보는 날이 그런 시험일과 겹쳐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나는 면접장에서 순서를 기다리다가 다른 공무원 시험을 보기 위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허겁지겁 대구를 향해 갔습니다. 물론 결과는 당연히 양쪽 모두 다 낙방이었습니다.

 

 

만약 그때 사립학교 면접시험을 보고 합격을 했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는 장담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다음해인 1987년 봄부터 목에 이상이 생겨 말을 잘 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말을 못하는 선생이 교직 현장에 남아있을 수 있었을까요? 특히 사립학교에서 견뎌낼 수 있었을까요? 

 

저는 다행히 공립학교 교사였기 때문에 몸이 아프고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을 때도 윗분들이 제 형편을 아시고 인간적으로 많이 봐주셨습니다. 그랬기에 그나마 교직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학부모님들과 아이들에게는 아직도 두고두고 미안한 마음이 가득합니다.  

 

1987년 8월 3일, 나는 죽고싶다는 생각만 하며 칠불암 절벽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어리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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