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혜곡에는 한번은 반드시 들어가볼 만한 집이 두어채 있다.
그 첫번째가 김호 장군 고택이다.
동네에는 소박하되 참한 집들이 모여 있었다.
위압감을 주는 큰 집도 없고 남 기죽일 정도로 으리으리한 집도 없다.
내가 식혜곡을 찾아갔던 날에는 라일락이 한창 무르익던 봄날이었다.
동네 골목에는 쓰레기 하나 보이지 않는다.
교양있는 어른들만 살아서 그런지도 모른다. 아니 개념없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이 동네에는 누비장 김해자선생이 산다.
김해자 선생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07호로 지정된 분이다. 오래전에 친구를 따라 가서 한번 만나뵌 적이 있었다. 그 댁을 한번 방문해보는 것이 식혜곡 마을에서 해야할 두번째 일이다.
반송밭과 너머로 보이는 길을 따라 가면 남간마을에 이른다. 복숭아꽃도 피었다. 요즘도 그런지는 모르지만 옛날 시골에서는 복사꽃이 피면 동네 아가씨들 마음도 함께 달아오른다고 했었다.
골목 모퉁이를 돌아섰더니 고택 한채가 기다리고 있었다.
김호 장군 고택이다.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어서 모르는 분들이 많지 싶다. 선생의 업적에 대해 DAUM백과에서는 글상자 속의 내용처럼 소개하고 있다.
관직생활을 마치고 향리 경주로 내려와 살고 있던 전 훈련원 봉사 김호는 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일으켰다. 김호는 경주 부근을 돌면서 민심을 안정시키고 의병의 대오를 갖추어 훈련을 시키고 있었다.
노곡전투 당시 경상북도 일대에서는 의병장 권응수가 영천성을 이미 수복하여 지키고 있었으며, 경상좌병사 박진은 안강에 주둔하면서 치안회복에 힘쓰고 있었다. 일본군은 영천군, 의성군, 안동부를 잇는 보급선을 버리고 후퇴한 후 양산군, 밀양부, 청도군, 대구부를 통하는 전선만을 굳게 지키면서 경주에는 소수의 병력을 주둔시키고 있을 때이다.
이때 양산성을 지키고 있던 이시카와 야스카쓰(石川康勝) 등 장수들은 언양현에 군사를 보내 점령한 다음 더 북상하여 경주 부근까지 점령하기로 결의했다. 영천성을 탈환한 의병들이 경주성을 공격할 것에 대비하여 양산 주둔 일부 병력의 경주성 파견을 결정한 것이다. 양산에 주둔하던 병력 중 500명이 경주성을 지키고 있던 일본군을 지원하기 위해 출정하여 1592년 8월 1일 언양에 도착했다. 이들은 언양을 거쳐 바로 경주로 향했다.
이때 경주 부근에서 군사훈련을 하고 있던 의병대장 김호는 척후병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전 현감 주사호(朱士豪)를 선봉장으로 삼아 의병 1,400명을 거느리고 8월 2일 이른 아침에 언양 쪽으로 출동했다. 의병부대 선봉이 경주 인근을 벗어나 노곡(奴谷, 현재의 경주시 내남면 이곡리 경부고속도로 경주휴게소 부근)에 이르렀을 때 일본군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의병 선봉대는 함성을 울리며 돌격했고 일본군은 갑작스런 공격을 당하여 계곡으로 퇴각했다.
김호는 노곡에서 군사 500여 명으로 적의 퇴로를 막았으며, 소모유사(召募有司) 최신린(崔臣隣)은 400여 명을 이끌고 반대쪽으로 가 적을 포위했다. 세 방면에서 포위당하고 있음을 알게 된 일본군은 포위망을 뚫고 나가기 위해 최신린이 지키고 있는 산비탈 쪽으로 기어 올라갔다. 의병들은 돌을 굴리고 활을 쏘아 적병 다수를 사살했다. 최신린은 기마에 능숙하지 못했는데 말이 넘어진 후에는 말을 타지 못하고 큰 나무 뒤에서 활을 당기기만 했다. 주사호는 백병전이 시작되자 곤장을 들고 닥치는 대로 적을 타살하니 다른 의병들도 모두 앞을 다투어 싸웠다.
한편 의병장 김호는 말을 몰아 수없이 적의 머리를 베었으나 그의 몸에도 화살 7~8대가 꽂혔다. 그 상태에서도 김호는 적진을 좌충우돌하면서 전투를 벌였다. 의병군은 도주하는 적군을 추격하여 다시 50여 급을 베었다. 8월 2일의 이 전투를 노곡전투라고 부른다.
김호는 전투가 끝나고 부대에 돌아와 전사했으며 나중에 공로를 인정받아 부산첨사로 추서되었다. 주사호는 노곡전투를 승리로 이끈 공로로 운량사(運糧使)가 되었으나 표창을 받은 날 퇴관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출처 : [Daum백과] 김호 장군 고택
알고보면 그는 숨은 영웅이다. 요즘 말로 하자면 호국영웅이다.
기와를 얹은 본채는 다섯칸짜리 한옥이다.
대문곁에 화장실이 있고.... 뜰에 라일락이 곱게 피었다. 향내가 뜨락에 가득했다.
본채 왼쪽엔 사랑채가 있다.
사랑채는 세칸짜리 초가다.
마당에는 우물이 있었다. 돌로 우물 주위를 감쌌다.
사람이나 짐승이 빠지지 않도록 나무로 삼각뿔을 만들어 거꾸로 박아놓았다. 멋진 아이디어다.
본채 오른편 뒤쪽으로 사당이 자리잡았다.
아궁이와 겹으로 된 문들.....
주인 아줌마가 보이길래 허락을 얻고 사진을 찍었다.
마당에는 잔디가 깔려있었는데 잘 손질되어 있었다.
이 집에는 간단한 음식을 파는 모양이다. 청국장과 국수종류를 주로 만드시는가보다.
남산 탐방을 즐기는 분들이 문화해설사나 가이드를 통해 미리 예약하면 음식을 준비해준단다.
사랑채 입구가 너무도 정감넘치게 만들어져 있었다.
혹시 음식맛을 보고자 하는 분들을 위해 주인 전화번호를 사진찍어왔다. 주인 아줌마가 외출을 하신다기에 나는 서둘러 돌아나왔다.
이제는 왔던 길을 따라 돌아갈 차례다.
마을회관은 깔끔한 신식 한옥이었다.
나는 화백정을 거쳐 월정교가 보이는 곳으로 걸어나갔다.
경주는 언제봐도 정겨운 도시다.
나는 여기서 40년을 살았다. 나에게는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지만 이제 이 도시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하자.
나는 경주 사람이 아니다. 내가 정을 주는 곳은 정작 따로 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곳에 너무 오래 살았다.
교촌 마을까지 왔던 분이라면 도당산에 한번 올라가보기 바란다. 그게 진정한 경주여행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리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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