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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17 베트남-월남의 달밤 1(完)

호치민 박물관

by 깜쌤 2017. 3. 10.

 

박물관 입구에는 군복 입은 호치민이 관람객을 환영해주었다. 그는 1890년, 베트남 중부 후에부근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적 이름은 호지명이 아니었다. 2층은 근현대사 전시실인데 사진 자료들이 많았다.

 

 

그가 쓰던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기도 했다.

 

 

진짜 볼거리는 3층 전시실에 다 있다고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나는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걸어올랐다.

 

 

3층 중앙 공간에서 우리를 맞이한 것은 호지명(=호치민)의 동상이었다. 

 

 

'호아저씨'라는 별명에 걸맞은 표정과 자세다. 베트남인들에게 호치민의 존재는 절대적이다. 오늘 우리나라에서는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이 탄핵당했다. 무능의 극치를 보여주다가 결국은 멸시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으니 부끄러움에 할말을 잊는다. 왜 우리는 호치민같은 지도자를 갖지 못하는가?

 

 

중앙 공간에서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면서 구경하면 된다.

 

 

호치민의 동상이 있는 공간이다. 

 

 

 박물관에다가 미술관의 개념을 덧붙여두었다고나 해야할까? 내부 장식과 공간 구성이 절묘하다.

 

 

시계방향으로 따라가면서 보면 된다. 백인 관광객들이 관심을 가지고 차분하게 살피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베트남 최후의 왕조인 응우엔 왕조의 하급관리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호치민은 후에(=훼)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호치민이 다녔던 학교가 오늘날에도 후에에 남아있다.

 

 

그는 베트남을 지배했던 제국주의 프랑스 세력의 착취에 항거하는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가 퇴학을 당했다고 한다.

 

 

호치민은 프랑스를 더 자세히 알기 위해 프랑스로 건너갔다. 호사스런 유학을 떠난게 아니다. 그는 온갖 궂은 일을 하며 프랑스 식민지국가와 미국같은 나라를 떠돌았다.

 

 

그는 파리에서 사회당원이 되었고 베르사이유 강화회의에 '베트남 민족요구서'를 제출했지만 철저히 무시당했다.

 

 

서른살 무렵 그는 프랑스에서 공산당원이 되었다. 사진 속의 그는 1945년 당시의 모습이다.

 

 

그 이후로는 소련과 중국에서 활동했다고 전한다.

 

 

1930년경부터 그는 코민테른의 지원을 받아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세계 제2차대전이 발발하고 난 뒤, 그는 베트민을 조직하고 팍보 동굴에 숨어살면서 독립운동에 박차를 가했다. 

 

 

한때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에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체포되어 중국에서 수감생활을 하기도 했다. 

 

 

세계 제2차대전이 끝난 뒤에도 프랑스는 베트남에서 물러나지 않고 다시 지배권을 강화하려고 시도했다.

 

 

이에 격분한 호치민은 프랑스와 투쟁하여 마침내 프랑스군을 디엔비엔푸에서 궤멸시키고 프랑스 세력을 베트남에서 내쫒는데 성공했다. 

 

 

프랑스 세력을 몰아냈다고 해서 베트남에 평화가 찾아온게 아니었다.

 

 

제네바회의에서 열강은 베트남을 남북으로 갈라놓았다. 

 

 

다시 이번에는 통일전쟁이 시작되었다. 1965년 미국은 통킹만 사건으로 베트남 전쟁에 뛰어들었고 우리가 잘아는 월남전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는 북쪽 베트남, 즉 월맹의 지도자로서 미국에 대항하여 투쟁하기 시작했다. 

 

 

1969년 79세의 나이로 그는 통일을 보지못하고 사망했다. 그가 독신으로 살다가 죽었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1969년 9월 2일, 그가 1945년에 베트남독립선언서를 낭독했던 바로 그날 오전에 사망했던 것이다. 

 

 

그가 죽은 뒤에도 월맹과 미국사이에 전쟁은 계속되었고, 결국 미국이 지원했던 남쪽 월남이 1975년 4월 30일에 패망하므로써 베트남 통일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나는 박물관 바깥으로 나갔다.

 

 

남쪽 베트남(우리가 흔히 말하는 월남)이 패망한 결과 오늘날의 '베트남 사회주의 인민 공화국'이 건설되었던 것이다. 

 

 

호치민은 유언장을 통해 전쟁이 끝나게되면 남쪽 사람들에게 관용을 베풀어주라고 당부했다고 전한다. 그 결과 남쪽에서는 대량학살극이 발생하지 않았다.

 

 

호아저씨라는 칭호가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박물관을 나온 나는 호치민주석 기념단지를 향해 걸었다. 호치민 묘소 뒤로 길이 나있으므로 걸어가면 금방이다.

 

 

호치민주석 기념단지 입구에서 표를 샀다. 그런 뒤 안으로 들어섰다. 

 

 

 호치민주석 기념단지 안 공간에는 관람객으로 가득했다.

 

 

 

 

 

 

어리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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