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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17 베트남-월남의 달밤 1(完)

탕롱왕궁 2

by 깜쌤 2017. 3. 1.

 

 표를 산 뒤 그냥 입장해버리기가 아쉬워서 입구 부근의 전시물을 조금 살펴보았다. 외세와의 투쟁결과로 거둔 자랑스런 승리는 항상 내세우고 싶은게 뭇 인간들의 심리이리라. 



4만동짜리 카드로 된 입장권을 검사대에서 밀어놓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왕궁 전면은 너른 잔디밭이다.



입장권 판매대를 나오면 오른쪽에 큰 비석이 나오는데 한자 글씨가 너무 희미해서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이렇게 단장해놓은 것으로 봐서는 나름대로 큰 뜻을 담고있는 것 같지만 남이 모르는 글자로만 되어있다면 제대로 된 의미전달이 불가능하다.



자랑과 소개를 하고자하되 상대가 못알보고 못알아듣는다면 가치가 없다. 그건 그렇고, 혹시 바위에 철분 성분이 많은게 아닐까?



나는 비석 읽어보기를 포기하고 잔디밭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왕궁으로 향했다.



중국의 거대한 성과 비교해서 규모가 이러니저러니하고 따질 필요는 없다. 나라마다 형편이 있고 사정이 있는 법이며 물산의 차이가 있으니까. 왕성으로서 이 정도면 작은 것은 아니었으리라.



눈앞에 보이는 문이 도안몬이다. 한자 발음으로 옮기면 단문이다. 이 문이 정문이라고 보면 된다. 성문은 모두 5개다.



호안끼엠 호수가에서 이태조의 동상을 본 기억이 있다. 그 이태조가 건립한 왕조가 리왕조다. 그가 하노이에 천도를 하면서 세운 성이 바로 탕롱성이다. 서기 1010년의 일이라고 하니 지금부터 천년전 일이다.



당시의 배치도가 자료로 남아있었다. 홍강의 지세를 적절히 활용한 시가지구성이 눈길을 끌었다. 



문은 정면에서 바로 바라보아야 위용을 확실히 알 수 있다. 바로 앞에 보이는 정문은 출입이 제한되어 있었다. 가운데 제일 큰 문으로 황제가 출입했다고 한다. 잠깐만! 이 성을 황성으로 불러야할지 왕성으로 불러야할지 그게 조금 애매하다. 중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황성과 왕성은 분명 다르기때문이다.

 

 


베트남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황성으로 불려지고 싶으리라. 황제가 살면 황성이고 왕이 살았으면 왕성이라는 단순한 용어상의 구별일수도 있지만 자존심의 문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중국 주변국가들이 칭제건원을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던가를 생각해보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다. 오른쪽에 보이는 문을 사용해서 들어가도록 되어 있었다.



베트남 사람들도 분재를 좋아하는가보다. 제법 잘 가꾼 분재들이 상당히 많았다.



입장해서는 성루에 먼저 올라가봐야겠다는 느낌부터 들었다. 



성벽에 나있는 성문 가운데 한두개는 수리중이었다.



오른쪽 담장은 낮았다. 파괴된 것을 재건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진실은 나도 모른다.



성벽 위에는 연꽃모형을 배치했다.



안으로 들어섰더니 아오자이를 입은 여인들이 즐비했다. 분위기를 살펴보니 웨딩촬영을 하는 것 같았다.



 베트남여인의 매력은 아오자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싶다.



논(Non)은 삿갓을 닮은 삼각모자다. 근세에 전쟁터를 누비던 유럽의 장군들이 쓰던 삼각모자 말고 우리 조상들이 쓰던 삿갓 닮은 모자!



아오자이는 옆이 터진 긴 상의와 바지로 이루어진 전통의상이다.

 


 아오자이를 입은 여인들이 즐비했다. 짐작컨데 결혼을 앞둔 양가 사돈식구들이 모두 모여서 나름껏 사진을 촬영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들의 얼굴을 조금씩 살펴보았는데 어떤 한 중년부인의 외모가 아주 출중했다. 그녀의 모습을 대놓고 찍을 수가 없어서 아쉬웠다.

 

 

나는 성루에서 내가 걸어온 길을 살펴보았다. 저 멀리 앞에 보이는 붉은 기와를 인 건물이 입장하는 곳이다.

 

 

베트남 특유의 노란색으로 칠한 성루의 외관이 특이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정문 안쪽 공간에는 발굴했던 당시의 모습을 재현해두었다.

 

 

베트남인들의 자부심을 나타내는 건축물인 만큼 알 수 없는 무게감이 서려있었다.

 

 

나는 성루 전면으로 펼쳐진 너른 공간을 살폈다.

 

 

그리고는 입장했던 곳으로 다시 내려갔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안 공간은 상당히 넓었는데 그 속에 다양한 건축물들이 얽혀있었다.

 

 

나는 중앙 성문쪽으로 가보았다.

 

 

아까 위에서 내려다보았던 발굴현장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천년전의 지표면은 지금보다 조금 더 낮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당시의 길은 돌로 포장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도안문을 지나면 서양풍 건물이 바로 앞에 나타난다.

 

 

천년이나 전에 이런 건물을 지었을리가 없으므로 누가봐도 프랑스 통치시기에 지은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겠다. 

 

 

양식 건물 회랑에서 도안문을 본 모습이다.

 

 

건물 회랑에는 베트남의 절경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언뜻보면 중국서부의 사천성이나 서남의 운남지방 풍경같다.

 

 

 건물 모퉁이를 돌아갔더니 또 다른 건물군들이 나타났다.

 

 

베트남의 분재들도 동남아시아 분재들과 상당히 닮은 것 같다. 일본 스타일은 이와는 다르다.

 

 

중국 분재도 일본 및 우리와는 형식이 조금 다른 것 같다.

 

 

한쪽에 종루가 있다면 맞은 편이나 또 다른 어딘가에 고루가 있어야할 것이다.

 

 

종 몸체에 알파벳이 들어있는 것으로 보아 예전 물건은 아닌듯하다.

 

 

반대쪽 끝머리에 고루가 있었다. 고루라고 해봐야 커다란 건물은 아니고 작은 정자 안에 북이 매달려 있는 정도였다.

 

 

그래도 갖출 것은 고루고루 갖추어두려고 노력한듯 하다.

 

 

베트남도 용 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성 이름도 탕롱 아니던가? 탕롱은 용이 하늘로 올랐다는 뜻을 가진 말이다.

 

 

고루에 매달린 북은 최근에 만든 것이라는 사실을 쉽사리 알 수 있었다. 베트남 전쟁중에 파괴된 것을 복원한 것일까?

 

 

중국인들이라면 구룡벽을 만들었겠지만 베트남 탕롱 황성안에는 계단에 용이 만들어져 있었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보았다. 

 

 

상당히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원래는 채색되어 있었던 것 같다.

 

 

 

 

 

어리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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