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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16 중국-대륙의 오지:중경,귀주,광서(完)

장사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구지를 찾아가다 2

by 깜쌤 2017. 2. 4.

 

이런 골목속에 임시정부 건물이 남아있었으리라고는 상상을 못했다.

 

 

"남목청 6호, 대한민국 임시정부(장사) 활동구지"라는 글씨가 선명했다. 우리가 읽는 한자발음 장사 대신 중국인 발음대로 창사로 기록해두었다.

 

 

백범 김구선생을 비롯한 이청천, 유동열선생같은 독립운동 지사들이 어쩌면 이 길을 자주 지나다녔을지도 모르겠다.

 

 

백범선생의 고귀한 뜻을 기리고 싶어서 주변 풍경을 세밀히 담아보았다.

 

 

골목 너머로는 장사시의 부흥을 알리는 빌딩이 하늘로 솟구쳐 올라가고 있었다.

 

 

겨울나기 옷을 입은 개 한마리가 우리들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처음보는 사람들을 나그네로 인식하는 것일까?

 

 

좁은 골목이지만 주차선을 그어 단정하게 주차시킨 차들이 보인다. 나는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아무렇게나 주차하고 사라지는 우리나라의 무개념 인간들이 생각나서 안타까움을 느낀다.

 

 

어느 가정집 처마밑에는 생선 두마리가 매달려 물기를 날려보내고 있었다. 

 

 

묘묘유아원으로 이어지는 골목 안쪽으로 벽면에 게시판이 붙어있었다.

 

 

나는 골목안으로 선뜻 발걸음을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그동안 열번정도 중국 곳곳을 돌아다니고나자 이제 조금씩 우리 역사를 바라보는 눈이 떠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리라. 나같은 범부가 어찌 감히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친 열사들의 고귀한 뜻을 헤아릴 수 있으랴싶어 조심스러워지기도 했다.

 

 

나는 동행인과 함께 하나씩 살펴가며 읽었다.

 

 

김구선생이 활동하시던 시대에 이런 건물들이 존재했었을까?

 

 

중한문화장랑! 중국과 한국을 문화로 연결하는 긴 골목이란 뜻이겠지. 북한을 나타내는 조(朝)라는 말대신 한()이라는 말이 쓰여진 것으로 보아 중국측의 세심한 배려를 읽을 수 있겠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글자가 게시판 안에 선명했다.



임시정부에 관한 설명이 제법 세밀했다. 이번 기회에 중경에서 임시정부청사를 보았고 장사에서 또 보게 되었으니 참으로 의미있는 여행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임시정부청사로 이어지는 골목길을 단정하게 다듬어두어서 너무나 흡족했다. 



나는 될 수 있는대로 천천히 걸었다. 독립투사들의 높은 뜻을 이해하고 위대한 선조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본다는 감격때문이었으리라. 



김구선생이 여기에 몸을 숨기고 활동을 하셨다는 말이겠지. 지난 2015년 장사여행에서는 장사교외의 악록산까지 찾아가서 총상을 입으셨던 선생의 은신처 겸 휴양처를 찾아보았었다.  



백범선생이 총상을 입은 경위와 악록산 김구선생 은신처에 관한 내용이 궁금하신 분들은 아래 글상자의 주소를 클릭해보시기 바란다.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가 나를 끌어당기는 것만 같아서 나는 자주 뒤를 돌아보았다. 저 할머니는 이 거리 곳곳에 스며든 우리 선조들의 아픔과 서러움과 애환을 조금이라고 지켜보셨을까?



마침내 나는 김구선생 거처 겸 장사임시정부 건물 앞에까지 이르렀다. 그리 길지도 않은 골목이지만 애써서 천천히 걸었다.



중국 특유의 검은 빛이 나는 벽돌 건물이었다. 그런데 말이다.....



안타깝게도 문이 잠겨있었다. 우리가 너무 늦은 시간에 찾아왔기 때문이리라. 오늘 한밤중에 출국을 해야하니 다시 찾아온다는 것은 빈말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골목으로 들어가 담장너머로 집모습을 살폈다. 백범선생이 담장바깥으로 얼굴을 내미실 것만 같았다. 

 

 

바로 이 장소에서 회의를 하다가 동포의 총에 맞았는지도 모른다.

 

 

며칠 전에는 대권의 꿈을 안고 귀국했던 외교관이 출마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했다. 그 험한 야바위판에서 발을 뺀 것은 정말 잘한 일이다. 그 판이 얼마나 더럽고 지저분한 판이던가? 희대의 간신배와 거짓말쟁이, 패권주의자, 자기 잘난 맛에 사는 더러운 인간들이 활개치는 그런 세상에 발을 넣은 것이 애시당초 잘못이었다. 

 

 

낯설고 물설기만 한 중국땅에서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친 독립투사는 꿈에도 그렸던 고국으로 돌아가면 동포들 모두가 열렬히 환영해줄 것으로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야바위판보다 더 더럽고 지저분했던 광복후의 정치판은 이념과 사상, 지역주의와 분파주의에 사로잡힌 인간들에게나 통하지 백범 선생같은 분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서재필 박사도 그런 놀음판에 크게 실망해서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던가? 그게 정치판이었다. 정치는 독립운동과는 차원이 다른 세계였다. 숱한 민족 지도자들이 동포의 손에 암살당하고 제거당하고 배신당했다.

 

 

나는 작금의 정치판에 깊은 환멸을 느낀다. 지역과 이념으로 갈갈이 갈라진 사람들은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도 틀렸다고 생각하고 입에 게거품을 물고 비판하고 욕을 한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나는 조용히 돌아섰다. 백범 김구선생은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거의 일년전인 1949년 6월 26일 오전에 대한민국 육군소위 안두희에 의해 총격을 받고 사망하셨다.

 

 

백범선생은, 가짜 김일성이었던 김성주(우리가 흔히 아는 김일성)와도 우국충정을 안고 만났지만 새파랗게 젊은 가짜의 위선과 거짓말에 욕을 당하셨다.

 

 

나는 괜히 서러워졌다.

 

 

이젠 돌아서자. 이 골목을 벗어나자. 선생의 고귀한 뜻을 어리석은 내가 털끝만큼이라도 욕을 보이기 전에 빨리 물러서자싶었다.

 

 

골목끝, 연기가 피어오르던 마당에 모여든 중국인들이 우리가 한국인임을 알아보고 따스한 애정의 눈길을 쏟아주었다.

 

 

"우리 조상들의 피땀과 눈물어린 귀한 터를 잘살펴주셔서 정말 고맙소이다."

 

 

 세월이 흐르면 누가 충신이고 우국지사였는지 저절로 알아진다. 작금의 정치판을 뒤흔드는 인물들도 훗날 반드시 역사의 심판을 받으리라.

 

 

나는 거짓말쟁이와 지역감정에 불을 붙이는 인간들을 경멸한다. 편가르기를 하는 인간들은 꼴도 보기 싫다. 

 

 

노무현 전대통령의 사진이 보였다.

 

 

호금도(=후진타오) 총서기의 모습도 보였다.

 

 

외교와 정치의 세계에는 영원한 적도 없고 영원한 동지도 없다. 그때 그때의 이익에 따라 배신과 편가르기만 존재할 뿐이다.

 

 

그리 길지도 않은 골목이 끝나가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물러나왔다.

 

 

골목에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점차 어두워져가는 골목에는 국산 자동차 한대가 자랑스런 맵시를 뽐내고 있었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