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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16 중국-대륙의 오지:중경,귀주,광서(完)

혁명가 모택동이 여기에서 살았다? 2

by 깜쌤 2017. 2. 1.

 

내 서재에는 모택동에 관한 책이 여러 권 있는데 그중 한 권은 754쪽까지 있는 제법 두꺼운 책이다.

 

 

지은이는 에드거 스노 !

 

 

제목은 <중국의 붉은 별>이다.

 

 

그 책 160쪽부터는 모택동 자신이 직접 밝힌 어린 시절에 관한 회상이 나온다.

 

 

나는 모택동이 어린 시절을 보낸 그 고향마을을 소산 버스터미널에서부터 걸어서 찾아가는 중이다.

 

 

얕으막한 야산이 연이어 지나가고 한쪽으로는 제법 너른 골짜기 평야와 저수지가 자리잡았다.

 

 

"나는 1893년 호남성 상담현 소산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모택동은 자기의 출생에 관해 그렇게 이야기를 꺼내고 있다. 

 

 

"아버지 이름은 모순생(毛順生)이고 어머니 이름은 문칠매(文七妹)입니다. 아버지는 빈농이었는데, 젊은 시절에는 빚이 많아 군대에 뛰어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랬던 아버지는 나중에 토지 약 3천평 정도를 장만해서 중농이 되고 나중에는 부농이 된다.

 

 

<삼국지연의>, <수호지>, <악비전>, <반당전>같은 소설을 즐겨읽었던 그가 인생의 전기를 맞게 된 것은 <정관응이 쓴 <성세위언>이라는 책을 읽고나서부터였단다. 

 

 

부농이 된 아버지의 쌀장사 장부책을 정리하게 된 모택동은 청소년기에 아버지의 권위와 횡포에 대항했던 몇번의 경험을 통해 저항과 파업의 위력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는 굉장한 독서가여서 독서를 통해 온갖 지식을 익힐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마침내 모택동 고거로 이어지는 갈림길까지 왔다. 마을 부근에는 모택동과 관련한 기념관과 유물관, 연구소들이 즐비하다.

 

 

부근 마을과 건물들은 하나같이 깔끔했다. 이는 중국을 건국한 역사적 인물이 탄생한 곳이라는 자부심의 발로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차도를 벗어나서 작은 개울옆으로 이어지는 인도를 따라 걸었다.

 

 

고향집으로 이어지는 도로에는 차량들이 즐비했다.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들판에는 초록이 가득했고 개울에는 오리들이 떼지어 놀고 있었다.

 

 

커다란 건물들은 하나같이 모택동과 관련있는 시설들이다.

 

 

마침내 고향집 부근까지 다다랐다.

 

 

작은 마을 입구에는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곳곳에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는 것은 기본이고 작은 동네 전체가 성역화되어있었다.

 

 

주변 환경 대부분은 고거경구라는 이름으로 아기자기하게 개발되어 있는듯 했다.

 

 

작은 계단을 올랐더니 아담한 규모의 저수지가 나타났다.

 

 

이 부근에서는 와이파이도 특별히 잘 터진단다. 다시 모택동의 회상을 들어보자.

 

"내가 13살쯤 되었을 때 아버지는 집에 많은 손님들을 초대했는데, 그자리에서 아버지와 내가 언쟁을 벌였습니다. 아버지는 손님들 앞에서 내가 게으르고 쓸모없는 놈이라고 욕했습니다. 나는 그 소리에 격분했어요. 그래서 나도 아버지를 욕하고 집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어머니가 나를 쫒아오면서 돌아오라고 달랬지요. 아버지도 나를 쫒아와 한편으로 욕을 퍼부으면서 돌아오라고 호령했습니다. 나는 연못가로 다가가 아버지가 더 이상 가까이 오면 물 속으로 뛰어들겠다고 위협했어요."

 

 

"아버지는 내가 잘못을 빌고 순종하겠다는 표시로 고두(叩頭 복종의 표시로서 자식이 아버지 앞에서, 신하가 제왕 앞에서 머리를 땅이나 바닥에 대고 조아리는 것)하라고 주장했습니다."

 

 

소산조상관이라는 이름을 붙인 사진게시판에는 소산을 방문한 많은 지도자들의 모습이 전시되어 있었다.

 

 

등소평도 여기를 다녀갔단다.

 

 

다시 모택동의 회고를 들어보자.

 

"나는 아버지가 나를 때리지 않는다고 약속한다면 한 무릎만 꿇는 반고두를 하겠다고 말했지요. 그래서 싸움은 끝났는데, 나는 이 일을 통해 내 권리를 지키기 위해 노골적으로 반항할 때는 아버지가 수그러들지만 온순하게 복종만 하고 있으면 아버지가 더 심하게 나를 욕하고 때릴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 모순과 불합리에 대한 저항과 불복종은 시민의 참된 권리다. 최순실 사태로 빚어진 촛불행진도 그런 의미가 들어있다.  

 

 

내가 모택동의 어린시절에 대한 회상 부분을 인용한 것은 그의 가슴속에 자리잡은 근본 의식을 조금이나마 엿보고 생각해보자는 뜻이다.

 

 

단층 흙벽돌집으로 이루어진 그의 생가는 수수하기 그지 없었다.

 

 

게시판에는 그의 출생과 어린 시절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기록되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흔하게 대할 수 있는 작은 야산 봉우리들이 앞 뒤로 포근하게 감싸고 있었다. 

 

 

집 앞에는 작은 연못이 자리잡았다.

 

 

바로 이 집이다.

 

 

여기에서 중국 근세사를 뒤흔든 인물이 나고 자랐던 것이다. 그의 삶은 우리 민족의 운명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그걸 부인하는 이는 거의 없으리라. 입구 가운데 붙었는 현판의 글씨 '모택동 동지 고거'는 중국번영의 초석을 만든 등소평이 직접 썼다고 전한다.

 

 

남안사숙! 모택동이 어렸을 때 공부했다는 곳이다.

 

 

한쪽 옆에는 남안사숙에 관한 설명을 적은 게시판이 서 있었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