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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6 - 하멜기념관

by 깜쌤 2016. 11. 17.

 

헨드릭 하멜! 네덜란드 사람이다. 1630년생이라니까 지금부터 약 4백여년전에 태어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1651년, 21살 되던해 당시 한창 맹위를 떨치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취업했다. 대포를 쏘는 포수로 말이다. 



1653년에는 네덜란드가 식민지로 삼고있던 바타비아로 갔다. 오늘날의 인도네시아 수도인 자카르타가 당시에는 바타비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서 근무를 하면서 선박항해의 모든 것을 기록하는 서기로 보직을 바꾸었다.



당시는 유럽인들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 '지리상의 발견(?)'이 속속 이루어지고 있었던 시기다. 유럽인들에 있어 아시아는 미지의 세계였으며 황금알을 낳는 교역장소였다. 일본과 중국에서 생산되는 백자나 청자는 유럽에서 엄청난 고가로 팔려나가던 시기였다. 그렇게 팔려나간 도자기들은 유럽의 왕실과 귀족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뿐이랴? 인도네시아의 여러 섬에서 생산되는 향신료는 유럽 상인들에게 더더욱 막대한 부를 안겨주었다. 향신료 무역으로 부를 쌓아올린 나라들이 베네치아 공화국과 네덜란드, 포르투갈등이다. 



오늘날 일본의 동경(=토쿄)으로 옮겨간  에도 막부는 네덜란드와의 교역을 통해 서양의 발달된 문물을 수입하고 있었고.....   네덜란드와 일본의 교역 창구가 바로 큐슈섬의 나가사키였다. 세계 제 2차대전때 미국으로부터 원자폭탄을 얻어맞은 도시가 나가사키다. 푸치니의 오페라 <마담 버터플라이>의 배경이 되는 도시도 나가사키이고..... 



일본인들이 나가사키에서 서양인과의 접촉을 통해 총을 구입하여 개량하였고 이를 임진왜란에 사용했던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일이다. 조총이 그렇게 해서 탄생한게 아니었던가?



네덜란드는 타이완에도 손을 뻗쳐 식민지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등장하는 와중에 타이완을 중심으로 하여 정성공이라는 인물이 복명반청(명나라를 다시 세우고 청나라를 쫒아내자는 운동) 운동을 한 것은 유명한 일이다. 



하멜은 동인도 회사의 명령으로 새로 부임하는 타이완 총독을 대만까지 호송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은 배, 스패로우 호크((Sparrow Hawk 네덜란드어로 스페르웨르)호를 타고 동료들과 함께 타이완으로 향했다. 1653년 6월 14일, 타이완의 안평에 도착하여 임무를 완수하였다.



임무를 끝내고나자 이번에는 나가사키의 데지마로 항해하라는 명령을 받게 되었다.



그해 7월 30일 타이완을 출발하여 일본의 나가사키로 항해하다가 폭풍우를 만나 악전고투하다가 결국 8월 16일경에 모슬포부근에서 배가 좌초된다.



선원 66명중 28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살아남은 자는 모두 38명이었지만 그들은 모두 모질고도 험한 고초를 겪게 된다. 



당시 조선의 통치자는 효종이었다. 북벌정책을 논하던 때라 선진기술을 가진 네덜란드 선원들을 억류하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비극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우리가 잘 아는 벨테브레(한국명 박연)가 우여곡절끝에 자기 조국사람을 만나 통역으로 나서게 된다. 박연은 26년전인 서기 1627년에 우리나라에 표류해 왔었다.



중국, 일본과 얽힌 외교적인 문제와 지방관리들의 무지함으로 갖은 고초를 겪던 그들은 1666년 9월 4일 밤에 탈출을 감행한다.



목적지는 일본의 나가사키였다. 그동안 수집한 정보를 통해 전라도 남해안과 나가사키와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을 파악했다고 한다.



4일 뒤인 1666년 9월 8일 일본의 고토섬에 도착했고 9월 13일 밤에는 마침내 나가사키의 데지마 상관에 도착하여 고국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데지마와 나가사키에 관해서는 아래 글 상자속의 글을 참고하기 바란다.


 




무려 13년 만이었다. 조선의 지도부는 무능했기에 국가발전 전략같은 것은 애초에 가지지도 못했다. 서학이나 북학에 관심을 가진 자는 드물었고 난학(=네덜란드에 관한 학문)에 관해서는 거의 무지했다. 우리나라에 표류해온 네덜란드 선원들의 처리방법도 무능의 극치를 달렸다. 



조선탈출에 성공한 선원들은 모두 8명이었다. 나가사키의 데지마 상관에 일년간 억류되어 있다가 1667년 일본을 출발한 하멜 일행은 바타비아로 향했다. 그 기간중에 하멜은 동인도 회사와의 임금문제 청산을 위해 보고서를 썼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게 하멜표류기의 원본이다.



어찌어찌하여 그 이듬해 유럽에서 하멜표류기라는 이름으로 암스테르담과 로테르담 같은 도시에서 출간되었다.

 


네덜란드에서는 코리아의 존재를 알고 무역거래를 위해 <코리아>호라는 이름의 배를 만들어 준비까지 해두었지만 일본의 교묘한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서양문물의 독점을 막기위해 왜놈들이 간교한 술책을 부린 탓이다. 조선에 억류되어있던 나머지 선원들은 1670년이 되어서야 일본으로 갈 수 있었다. 



1692년 하멜은 네덜란드에서 사망했다. 죽을 때까지 그는 독신이었다고 전해진다. 그가 남긴 기록때문에 사후에나마 유명해졌다고나 할까?



사연을 알고나면 마음이 짠해질 수밖에 없다.



하멜 상선을 둘러본 나는 산방산 쪽으로 걸었다.



그들이 최초로 표착한 지점은 어디쯤이었을까?



네덜란드는 오늘날에도 무역강국으로 번영하고 있다.



조선은 네덜란드 선원들을 통해 더 너른 세상을 배울 수 있었지만 무기제작을 배우는 정도로 끝나고 말았다. 그게 한계였다.



세상이 무서운 속도로 격변하고 있음에도 대학입시위주 정책으로 온 나라가 난리를 떠는 우리나라의 현실이 나를 슬프게 한다. 오늘이 바로 수능일 아니던가?



무능한 지도자와 간신배들이 주동하여 나라를 절단내는 현실이 서글프기만 하다.



높이 오르면 멀리봐야 하는 법이건만 눈앞의 이익에만 눈이 충혈되어 백성들을 위한 일을 하지 않고 몇몇 만을 위한 이익을 추구하는 이 현실이 너무 실망스럽다. 



 죽어나는 것은 민초들뿐이다.



하멜로 인해 나는 참 많은 것을 생각해보았다. 제주도 여행은 작년에 하고 글은 올해 쓰다보니 제법 많이 어설프다는 느낌이 든다. 



  산방산 부근에는 절이 있다.



 나는 천천히 산방굴을 향해 걸었다.



한번씩 되돌아보면 하멜을 기념하는 배가 바닷가에 그대로 정박해있었다. 육지에 만들어두었으니 어디로 갈 일이 있을리가 없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직 네덜란드에 가보질 못했다.



거스 히딩크의 고향마을에도 가봐야하는데.....



이렇게 재기만 하다가는 아무것도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오늘 제법 많이 걸었다.



다시 도로로 내려온 나는 절 앞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모슬포로 돌아온 친구와 나는 친구 누이가 차려둔 저녁을 먹고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