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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16 중국-대륙의 오지:중경,귀주,광서(完)

봉황고성 7 - 남화산 봉황

by 깜쌤 2016. 11. 12.

 

홍교 2층에 자리한 찻집 접수대 부근에는 그나마 낭만이 흘렀다.

 

 

나는 열어놓은 창문을 통해 타강 하류쪽을 살폈다.

 

 

아래로 내려와 밖으로 나오니 거리에는 사람들이 뱉어낸 대화 소음으로 가득차 있었다.

 

 

우리가 방금 내려왔던 홍교의 모습이다. 아름답다.

 

 

다리밑으로는 서민들 삶의 공간이 이어지고 있었다.

 

 

다리 입구에 이런 건물을 만들겠다고 처음 아이디어를 짜낸 인물은 누구였을까?

 

 

홍교입구에서 조금만 더 가면 남화산으로 오르는 계단이 나타난다. 물론 입장권이 있어야 오를 수 있다. 

 

 

그러므로 구입한 통표를 잘 간직하고 있어야한다. 남화산이라고 쓰여진 부분에 펀칭 기계로 구멍을 내어주었다. 우리는 계단을 올라갔다.

 

 

기와집으로 빼곡하게 들어찬 봉황고성의 모습이 조금씩 윤곽을 드러냈다.

 

 

타강 좌우로 옛날 집들이 몰려있었다.

 

 

봉황이라는 도시의 역사는 그리 만만한게 아니다.

 

 

작은 산이지만 곳곳에 중국인 특유의 미의식을 살려 볼거리를 숨겨놓았다. 

 

 

 산비탈 공간을 이용하여 찻집을 만들었다.

 

 

응달쪽에는 어제밤에 내린 눈이 아직도 조금 남아있었다. 

 

 

찻집 한구석에는 멋진 전망대가 있다. 안가볼 수가 없었다.

 

 

시내구조를 살펴볼 수있는 곳이니까 말이다.

 

 

전망대에 섰더니 타강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마을 전경이 나타났다.

 

 

만명탑과 뒷산 전망대의 모습이다. 저 높은 곳에는 결국 올라가지 못하고 말았다. 올라가는 길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전에는 타강 오른쪽을 살폈다. 오후에는 남화산에 오른 뒤 왼쪽 편을 볼 생각이다.

 

 

이제 봉황고성의 대략적인 모습이 짐작되리라.

 

 

타강에 걸린 다리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홍교가 발밑에 있다.

 

 

나는 돌아나와서 계속 계단길을 걸어 올라갔다.

 

 

날렵한 처마곡선이 하늘로 말려올라가듯 치솟아 오른 정자가 나타났다.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의자 모습을 살펴보자.

 

 

나무가지 사이로 사만(沙灣) 아래쪽의 풍광이 드러났다. 하류쪽으로도 큰 다리가 건설되어있는듯 하다.

 

 

정자바닥의 마름돌을 깔아둔 모습과 의자모양의 조화가 절묘하다.

 

 

정자너머로는 짧은 출렁다리가 이어졌다.

 

 

아무것도 아닌 야산 같은데 아기자기한 볼거리를 가득 만들어두었다. 이런 것을 보면 어떻게 해석해야할지 모르겠다.

 

 

다시 계단을 오른다.

 

 

계단을 오르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현판 글씨는 신봉전이 아닐까 싶다.

 

 

입구를 들어서면 돌바닥으로 이루어진 광장이 나타난다.

 

 

참으로 그럴듯하게 꾸며두었다. 흔해 빠진 야산인데 어떻게 이런 식으로 단장해둘 수 있는지 모르겠다.

 

 

입구 맞은편엔 전시관 비슷한 건물이 있다.

 

 

둥근 건물 위에 봉황 한마리가 턱 버티고 섰다.

 

 

광장 좌우에도 온통 봉황이다. 수컷이 이고 암컷은 이라고 한다지만 내눈에는 그녀석이 그녀석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모습이 다 달랐다.

 

 

이곳 지명이 봉황인데는 필시 유래가 있을 것이다. 이쯤에서 봉황이 무엇인지 의미를 알아보기로 하자. 먼저 Daum 백과사전의 풀이를 인용해보자. 문단 중간부분은 너무 장황한 것 같아서 생략했다.  

 

 

훌륭한 임금이 있어 지극한 덕으로 백성을 다스려 태평성대가 실현되면 하늘은 왕의 지위와 정책을 인정하는 어떤 징조나 표상을 내리는데, 이것이 상서(祥瑞)다. 여러 상서 중에서 최고 수준의 것이 봉황의 출현이다. 고대인들의 무한한 상상력이 창조해낸 봉황의 출현이 지니는 상징적 의미는 학이나 사슴 등의 등장과는 차원이 다르다. 봉황의 출현은 곧 성군의 탄생과 태평성대를 의미하기 때문에, 봉황 장식이 용과 함께 궁궐 장엄의 최고 지위를 누리게 된 것이다.

 

봉황은 수컷인 '봉'과 암컷인 '황'을 함께 이르는 말이다. 봉황은 용·거북·기린과 함께 사령(四靈)의 하나로 알려져 있고, 주조(朱鳥)·단조(丹鳥)·규화조(叫火鳥)·불사조(不死鳥) 등 여러 가지 별명을 가지고 있다. 머리는 큰 기러기, 부리는 닭, 턱은 제비, 목은 뱀, 몸은 거북이, 꼬리는 물고기를 닮았으며, 키는 6척가량이고, 몸과 날개에 오색이 빛난다. 또한 다섯 가지 문자의 상(像)을 지니고 있다고 하는데, 머리의 문은 덕(德), 날개의 문은 순(順), 등의 문은 의(義), 배의 문은 신(信), 가슴의 문은 인(仁)의 상이다. 울 때는 다섯 가지 묘음을 내며, 죽어도 다시 강한 생명력을 얻어 환생한다고 한다.

 

 

 

                <유리상자속에 봉황 모형이 들어있었다>

 

봉황은 그 행동도 신비롭고 환상적이다. 동방의 군자의 나라에서 나와 사해(四海) 밖을 날아, 곤륜산을 지나 중류지주(中流砥柱, 황하 중류에 있는 기둥 모양의 돌. 위가 판판하여 숫돌 같으며 세찬 격류에도 꿈쩍하지 않으므로 난세에 의연히 절개를 지키는 선비를 비유하는 말로 쓰임)의 물을 마시고, 깃털도 가라앉는다는 약수(弱水)에 깃을 씻고, 저녁에 풍혈(風穴)에서 잔다. 좁쌀 따위는 먹지 않고 대나무 열매를 먹으며, 오동나무에 둥지를 틀고, 예천(醴泉)의 맑은 물을 마신다. 인간의 끝없는 상상력은 봉황을 이처럼 환상적이고 신비로운 새로 미화하였다.

 

 

 

상상속의 새이지만 알고보면 굉장한 의미를 지닌 영물(靈物)이다.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이곳 봉황에서 봉황의 모형이 출토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근거없이 함부로 볼거리를 만들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출토당시의 모습을 재현해둔 것같은데.....  행운을 잡기를 원하는 중국인들이 어떻게 유리상자 속으로 돈을 밀어넣었는지 모르겠다. 이런 행동은 유물의 격을 떨어뜨리지 않을까?

 

봉황 유물과 가장 흡사한 원형은 서기 2000년, 호북성 강릉에서 출토되었다고 한다. 강릉이라면 삼국지연의에도 등장하는 곳이다. 원형은 형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전국시대 유물이라고 한다. 전국시대에 여기는 초나라의 영역이었다.  

 

 

호랑이를 밟고 봉황이 서있다. 초나라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봉황을 숭상했다고 한다. 거참, 묘한 일이다. 나는 갈수록 흥미진진해졌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