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지금 목표로 삼고 찾아가는 곳은 슐레이마니에(=슐레이마니예) 모스크다.
그랜드 바자르를 나와서 골목을 지나 찾아가는 중이다.
그랜드바자르 뒤에 있는 시장이 진정한 이스탄불 사람들의 시장이다. 지나치게 상업화되고 관광지화 되어버린 그랜드바자르와는 분위기 자체가 다르다.
사고자 하는 사람과 팔고자 하는 사람들이 뱉어내는 떠들썩한 소리로 활기찬 느낌이 시장바닥에 가득했다.
이리저리 몇번 모퉁이를 돌고나자 슐레이마니에의 담벼락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스탄불에서도 제법 높은 언덕에 자리잡고 있으므로 위에서 내려다보는 도시 경치가 일품이다.
둥근 아치와 일직선 기둥이 만들어내는 멋진 문을 통해 모스크 구역안으로 들어갔다.
슐레이마니에는 이스탄불에서 두번째로 큰 모스크로도 유명하다.
크기도 중요하지만 외관상의 아름다움도 보통이 넘는다. 지난 네번의 이스탄불 방문에서 항상 놓쳤던 곳이기에 이번에는 기어이 보고 가리라 마음먹었던 곳이다.
둥근 돔과 미나렛 4개가 만들어내는 실루엣이 일품이다.
사원 바깥 담장에 붙어서서 골든혼과 보스포루스 해협을 바라보면 그 멋진 전경에 감탄사를 뱉어낼 수밖에 없다. 골든혼에 걸린 갈라타 다리가 바로 아래에 있어서 손에 잡힐 듯하다.
탁심지구에는 현대식 고층건물이 즐비했다.
멀리 보스포루스 해협에 걸린 포스포루스대교도 육안으로 살필 수 있다.
사원 담장 바로 밑에 자리잡은 둥근 지붕은 하맘일 가능성이 높다. 터키식 목욕탕 말이다.
어느 정도 주위 분위기를 살핀 나는 모스크를 향해 슬슬 다가가보았다.
외부 정원의 잔디를 손보는 노인은 자기 일에 열심이었다.
이방인인 우리들은 정문 출입이 통제되므로 곁문을 사용하는 것이 당연하리라.
많은 현지인들이 슐레이마니에 사원을 둘러보고 있었다.
이 사원을 건축한 사람은 미마르 시난(Mimar Sinan)이다. 그가 남긴 기념비적인 건축물이 이스탄불 곳곳에 즐비하다.
그의 흔적이 이스탄불에만 존재할 리가 없다. 유럽에도 그의 흔적이 남아있다고 한다.
문을 들어섰더니 돌비석들이 즐비했다. 사방이 모두 돌로 포장되어 있었다.
모스크를 먼저 보기보다 모스크 바깥에 존재하는 슐레이만 1세의 무덤부터 보기로 했다.
슐레이만은 솔로몬의 아랍식 발음이다. 나는 무덤 안으로 들어가보았다. 사진 속의 단정한 하얀 건물은 슐레이만 왕비의 무덤이다.
건물 속에는 7개의 돌무덤이 존재한다.
그 중 하나가 슐레이만 1세의 무덤이다. 그는 우리나라로 치자면 광개토대왕 정도에 해당되는 인물이다.
서기 1520년에 술탄의 자리에 올랐던 그는 오스만 투르크제국의 영토를 최대로 넓혔던 인물이다.
그와 술탄들을 안치한 무덤은 그래서 그런지 화려함의 극치다.
터키인들은 그의 무덤에서 자긍심을 느끼는 것 같았다.
또 한쪽 옆에는 슐레이만 대제의 부인 무덤이 존재한다.
부인 록세라나도 터키 여성들의 자랑이다.
술탄과 술탄의 비를 모신 무덤의 설계자도 미마르 시난이다.
이 한쌍의 커플은 훤칠한 키를 자랑했다. 슐레이만 1세 술탄 내외도 그랬을까?
무덤 앞에는 참배객들이 끊이지 않았다. 건축가 시난은 예니체리 부대 출신이다. 예니체리부대는 그 용맹성 때문에 유럽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예니체리 부대원의 대부분은 크리스찬 집안 출신이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칼하다.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술탄의 군대가 점령한 유럽에서 터키인들은 의도적으로 크리스찬 가정에서 아들 한명씩을 징발해갔다. 그렇게 데려간 소년들을 개종시킨 뒤 맹훈련을 통해 최정에병사를 길러낸 것이다. 예니체리 부대에서 전사하지 않고 제대할 경우 엄청난 금전적인 보상과 함께 사회적인 지위가 기다리고 있었기에 그들은 용맹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시난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부모는 그리스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미마르 시난이라고 할 때 미마르는 건축가를 의미한다. 터키 건축사에서 그를 제외하고 어떻게 논할 수 있으랴?
모스크 건물을 자미라고도 한다. 자미 외벽의 아름다움도 대단하다.
고양이 한마리가 출중한 아름다움을 베게삼아 졸고 있었다.
외부 정원에는 목백일홍이 만발했다.
우리는 서쪽으로 돌아갔다. 건물이 주는 단정함이 마음속으로 파고 들어오는듯 했다.
건축물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도록 만들어주는 것은 건축가의 능력이다. 어떤 건물에서는 싸구려 냄새가 진동하지 않는가 말이다. 시난의 건축물에서는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다.
미마르 시난의 출생지는 카이세리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카이세리라면 카파도키아 지방의 관문격인 도시다.
아치와 기둥이 그려내는 아름다움이 이국적으로 다가왔다. 여기에다가 아라비아 스타일의 음악이라도 깔리면 환상적이겠다.
무슬림들이 모스크에 드나드는 출입구다. 이방인들과 여성들은 다른 문을 쓰게 한다.
우리는 모스크 내부에는 들어가지 않고, 건물 북쪽에 딸린 회랑으로 둘러싸인 부속건물 마당으로 들어가보았다.
여성 참배객들이 문을 통해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들은 남성들이 출입하는 문과는 다른 쪽에 난 출입문으로 드나들고 있었다.
관광객들과 이방인들이 계속 몰려들었다.
우리는 그늘에 앉아 사람들을 살폈다.
이슬람의 여성 차별은 교묘하다고 할 수 있다.
여성차별은 남성들의 횡포이자 일방적인 만행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나라도 그런 면에서 그리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씁쓸함을 안고 우리는 외부로 이어지는 통로를 따라갔다.
마침내 바깥으로 나갈 수 있었다. 이 문을 나서면 성(聖)을 벗어나 속(俗)의 세계로 진입하는 것이다.
어리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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