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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15 아르메니아, 조지아, 터키(完

아야 소피아 4

by 깜쌤 2016. 10. 6.

 

 나는 대리석 문을 통과해서 갤러리에서 빠져 나왔다. 



우리나라 역사와 견주어서 백제전성기 때의 건축물이 남아있다는 것은 굉장한 사건이지만 유럽에서는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크리스찬의 입장에서는 이방인의 손에 넘어간 건물이지만, 이방인에 해당하는 투르크인들이 건축물 자체를 파괴하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다. 



 치품천사가 그려진 벽면을 복원하다가 속에서 천사의 얼굴을 찾아낸 모양이다. 그게 몇 년전의 일이었단다.



서기 537년에 완공된 하기아 소피아는 1500여년의 세월을 버텨냈다. 



완공된지 20여년만인 서기 557년에 대지진이 비잔티움을 덮쳤을 때 중앙의 돔이 무너져 내렸다고 한다.



서기 843년경부터는 모자이크화들이 성당 내부 곳곳에 추가되었다고 전한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통령(=Doge 도제)이었던 엔리코 단돌로가 거느리는 제4차 십자군이 비잔티움을 함락시키고 약탈한 것이 서기 1204년의 일이다. 



 나는 경사로를 통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1453년 5월 28일, 마침내 비잔티움은 오스만 투르크 군대에 의해 함락되면서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은 그 수명을 다했다.



정복자 메흐메트 2세는 하기아 소피아를 아야 소피아라는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고 성당을 모스크로 개조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1849년경에 보수작업을 끝내면서 거대한 메달리온을 신도석 벽면에 매달았다. 



1935년 근대 터키의 국부로 추앙받고 있는 케말 파샤는 이 건물을 박물관으로 사용키로 함으로써 오늘날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결정을 한데에는 서방세계의 압력도 존재했었다.



아야 소피아의 역사를 대략적으로라도 개관해보았지만 이 건물이 지닌 슬픈 애환을 우리가 어찌 다 이해할 수 있으랴싶다.



대리석으로 화려하게 만든 건물이지만 영욕의 역사가 건물 곳곳에 수북하게 쌓여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세례를 베풀던 공간으로 잠시 들어가보았다.



기독교인으로서 세례를 받았든지 무슬림으로서 세례를 받았든지 간에 세례를 받는 순간에는 모두들 나름대로 자기 믿음을 지켜나가겠다는 다짐 정도는 엄숙하게 했으리라. 



원형 세례장을 보기 위해서는 1층 출구로 나가다가 왼쪽 편으로 꺾어들어가야만 구경할 수 있다. 



세례를 베풀기 위해서는 물이 필요했다.



성수를 담아두는 항아리와 욕조를 갖추어 두는 것은 기본이었을 것이다.



나는 술탄들의 무덤을 보는 것은 포기하고 세정식을 하기 위한 분수대를 보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왼쪽의 둥근 건물이 세정식 분수다.



건물이 단아하다.



아랫부분에는 수도 꼭지가 달려있어서 신체를 씻을 수 있도록 했다.  술탄 마흐무드 1세에 의해 1740년에 건립되었단다.



이제 출구가 바로 앞에 있다. 



두 건물 사이에 출구가 존재했다.



입구쪽으로는 많은 이들이 줄을 서서 입장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밀하게 보려면 한없는 시간을 투자해야겠지만 오늘 일정이 바쁘니 그 정도로 보고 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까만 원피스를 입은 여성은 서구인일 것이다.



반면에 바로 이 사진에서 감은 옷을 입은 여성은 차림으로 보아 틀림없는 무슬림이다. 과연 누가 옳게 사는 것일까?



사회적 약자들이나 여성들을 속박하여 제도의 틀 안으로 밀어넣는 행동은 과연 옳은 것일까? 



종교가 가지는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어떤 종교가 진실과 진리를 담고 있는 것일까?



나는 그런 궁금증을 안고 아야소피아 담장 밖으로 나갔다. 



담장 밖에도 입장을 기다리는 많은 이들이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시르케치 기차역으로 이어지는 트램 궤도 옆으로 난 인도를 따라 걸었다. 



하얀색으로 도배를 한 트램 외부에는 현대자동차 광고가 나그네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내가 젊었던 날, 해외에서 우리나라 상표를 만나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7년전만 해도 이스탄불에서는 볼 수 없었던 광경을 지금 보고 있으니 느낌이 저절로 새로워졌다.





 

어리

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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