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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16 중국-대륙의 오지:중경,귀주,광서(完)

귀양가다 3

by 깜쌤 2016. 4. 14.

 

골짜기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공원으로 조성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분홍색 옷을 입은 꼬맹이가 왜 그리 예쁜지......

 

 

황금색 기와를 올린 집들이 시선을 끌었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중국인들의 개발 솜씨도 보통이 넘는다는 사실이다.

 

 

맞은편에는 고급장비를 갖춘 사진사들이 몰려있었다. 무엇을 찍으려는 것이었는지 모르겠다.

 

 

휴게소인가보다.

 

 

곳곳에 아름다운 건물들이 숨어있었다.

 

 

중국 특유의 날렵한 곡선 처마를 지닌 정자가 풍광을 한결 서정적으로 만들어주고 있었다.

 

 

길가 건물에서 사진자료가 가득 전시된 게시 공간을 만났다.

 

 

단번에 눈길을 끄는 것은 장학량양호성의 사진이었다.

 

 

그 두사람은 서안사변과 관계된 인물이 아니던가?

 

 

그 사건과 귀양의 검령산공원이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나는 부쩍 호기심이 일어나면서 궁금증이 생겼다.

 

 

지금 우리는 기린동이라는 동굴 부근에 와있다.

 

 

알고보니 기린동 부근에 서안사변과 관련된 인물이 머물렀던 장소가 있는 것이다.

 

 

그게 누구일까?

 

 

그 대표적인 인물이 장학량이다.

 

 

나는 입구를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장학량이 장개석에 의해 구금된 현장이 이 속에 있었다.

 

 

장학량이 구금된 건물 맞은편에 기린동이라는 동굴이 숨어있다. 

 

 

여기에 무슨 동굴이 있는가 싶어 거기부터 먼저 들어가보기로 했다.

 

 

어찌보면 유치하기까지 한 시설들이 들어있었다.

 

 

석회동굴같기도 하다.

 

 

그리 길지는 않다. 끝까지 가보니 밖으로 나와버린다. 나는 다시 장학량이 구금당했다는 건물을 보기 위해 입구를 통해 재입장했다.

 

 

이제 기념관 안으로 들어간다.

 

 

서안사변의 대략은 이렇다. 위키 백과에서 가져온 자료다. 다른 글에서 길게 쓴 사실이 있으므로 간략하게 언급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시안 사건 또는 서안사건, 시안 사태, 시안 사변(西安事變西安事变Xī'ān Shìbìan)는 1936년 12월 12일 동북군 총사령관 장학량이 국민당 정권의 총통 장개석을 섬서성의 성도(省都)인 서안(西安) 화청지에서 납치하여 구금하고 공산당과의 내전을 중지하고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함께 싸울 것을 요구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국민당군과 홍군은 국공내전을 중지하고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져 함께  일본을 상대로 한 대 일본 전쟁을 수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장학량은 이 사건 후 자기에게 사심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남경으로 돌아가는 장개석과 동행하기로 발표한다. 스스로 볼모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장개석의 입장에서 보면 장학량은 자기의 원대한 계획을 그르쳐버린 인간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인질이 되겠다니 힘들이지 않고 정적을 제거하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구금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장개석은 중국대륙을 놓고 모택동의 홍군과 최후의 결전을 할때도 장학량을 데리고 다녔다. 그만큼 그에 대한 원한이 사무쳤으리라.

 

 

나중에는 장학량을 대만까지 끌고 가서 구금시켰다.

 

 

 

장학량의 일생을 위키백과 자료를 가지고 간단히 소개해보기로 하자.

 

1898년 6월 4일생이다. 만주에 근거지를 둔 군벌 장작림(張作霖)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장쭤린은 만주에 근거지를 둔 봉천군벌의 수장이었으며 친일적 성향을 가진 인물이었으나 1928년 6월 7일 장작림이 일본제국 관동군 소속의 고모토 다이사쿠(河本大作)에 의해 폭사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일제가 여성 편력과 아편 중독이 심한 것으로 알려진 장쉐량을 중국 내 영향력 행사에 이용하기 더 쉽다<장학량의 모습-출처: 위키백과>                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받은 장학량은 이를 극복해 내었고, 장쉐량과 장쉐량이 이끌게 된 만주군벌은 항일 성향으로 전환하였다. 1931년에 관동군의 공격으로 만주의 심양에 대한 영향력을 잃었다. 중국 섬서성 인근으로 이동한 그의 부대는 1936년 반공산군 공세를 위해 방문한 장개석을 시안(西安)에서 감금하고 제2차 국공합작을 요구한 서안사변을 주도하여 제2차 국공합작을 이뤄낸다.

 

장제스를 감금한 혐의로 10년 간의 징역형을 받았고, 출감 후 1949년에 대만으로 끌려가서 국민당정권에 의해서 1991년까지 자택연금 상태에 있었다. 장제스가 죽은 후, 1993년에 처음으로 대만정부에 의해 출국이 허용되어 곧바로 미국으로 떠났으며, 1995년부터 2001년 사망할 때까지 하와이에서 거주했다. 2001년 10월 14일 오후 8시 50분, 미국 하와이 주 호놀룰루 자택에서 향년 10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현대중국어로 발음해둔 부분은 우리나라 전통 한자 발음으로 옮겼음을 밝혀드린다.

 

 

세월이 흘러 장개석은 대륙의 통치권을 잃어버린 역사의 패배자가 되었고 장학량과 양호성은 승리자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기린동 뒤로 이어지는 산길을 따라 걸었다. 골짜기 속으로 멋진 공간이 이어졌다.

 

 

나는 이 골짜기 안에서 멋진 베이스 음성을 가진 사나이가 부르는 음악을 공짜로 감상할 수 있는 행운을 잡았다. 중국대륙에도 멋진 성악가가 숨어있단 말이지?

 

 

터널이 보였다. 어디로 연결되는지는 몰라도 안들어갈  수 있는가?

 

 

터널 끝이 보이기에 안으로 들어섰다.

 

 

터널 끝을 통과하자 거긴 동물원이었다. 골짜기 안에 호랑이가 내는 굵은 저음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소리에 끌려 찾아간 우리에는 백두산 호랑이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중국인들이 장백산 호랑이라고 부르며 자랑스러워한다는 그 호랑이다.

 

 

녀석의 체구는 장대했다. 백두산 호랑이가 내지르는 저음은 한결 더 웅장했고.....

 

 

새들을 모아놓은 곳도 있었다.

 

 

찬찬히 구경하기에는 시간이 모자란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벌걸음을 재촉했다.

 

 

결국 골짜기 속에 자라잡은 엄청 큰 절구경은 포기했다.

 

 

 대신 원숭이떼를 만났다.

 

 

사육사라고 여겨지는 두사람이 원숭이에게 먹이를 주고 있었다.

 

 

먹이를 앞에 둔 원숭이들의 경쟁이 치열하기만 했다.

 

 

자기 먹이를 챙긴 녀석들은 일단 안전지대로 옮겨가서 먹기 시작한다.

 

 

영악한 녀석들이다.

 

 

원숭이 구경에 넋을 놓고 있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골짜기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걸었더니 기린동으로 나오게 되어있었다.

 

 

다시 입구로 나와 왔던 길을 다시 걸어서 시내로 돌아왔다.

 

 

길거리를 걸으면서 서민들의 삶을 살피는 것은 여행자가 가지는 덤이다. 노점상이 파는 것은 조선배추였을까?

 

 

그런 재미를 놓쳐버리면 너무 억울하다.

 

 

의자 하나, 가위 한 개, 거울 하나로 먹고 사는 사람도 있다. 거리 이발사다.

 

 

제법 많이 걸었던가보다. 마지막에는 기진맥진했다. 노점상 아줌마에게 사과 6개를 10원에 사고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사들고 와서 끓여먹고 깎아먹었다.

 

 

내일은 청암고진을 가볼 생각이다. 문제는 검색을 해보아도 자료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다.

 

 

청암고진으로 가는 방법에 대해 써놓은 글이 있다고 해도 너무 간단해서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국 중국의 포털 사이트인 바이두에 들어가서 지도를 불러내놓고 세밀하게 살폈다. 그쪽으로 가는 시외버스터미널도 어디에 있는지 알길이 없는데......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기로 하고 눈을 붙였다.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