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깜쌤의 세상사는 이야기 : '난 젊어봤다' - 자유 배낭여행, 교육, 휘게 hygge, 믿음, 그리고 Cogito, Facio ergo sum
  • 인생 - 그리 허무한게 아니었어요. 살만했어요
배낭여행기/16 중국-대륙의 오지:중경,귀주,광서(完)

준의회의회지(준의회의구지) 2

by 깜쌤 2016. 3. 19.

 

기념관 안으로 들어섰더니 많은 인물상들이 나를 맞아주었다. 이 사람들이 도대체 누구일까?

 

 

모택동을 비롯한 대장정(大長征)동지들이다. 장정(長征)이라는게 무엇인가? 오랜 기간동안 정벌하러 갔다는 말이 아니던가? 대장정이라는 사건을 모르면 이 기념관의 의미는 희석되고 만다.

 

이제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보자. 깊이 들어가면 밑도 끝도없는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어가야 하므로 겉만 슬그머니 탐색하는 정도로 끝내고 싶다. 길이길이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싶은 글쟁이라면 대장정 사건을 가지고 대하소설을 쓰면 될 것이다.

 

 

대장정의 중심인물은 모택동이다. 그는 호남성 장사부근 상담시 소산마을 출신이다. 나는 이 여행의 마지막 날에 소산을 찾아갔다. 사진 속의 인물이 젊었던 날의 모택동이다. 중국식으로 발음하면 마오쩌뚱 정도로 소리가 나겠지만 나는 우리말 한자발음으로 소리내고 싶다.

 

사진의 아래부분을 보면 '정강산시기적모택동'이라는 간자가 보일 것이다. 정강산 시기의 모택동이라는 말이다. 정강산(井岡山)! 거기에서부터 장정은 시작되었다. 정강산은 어디에 있는 산일까?  

 

 

 

정강산은 강서성과 호남성 접경지대에 자리잡은 산이다. 1930년대 초반 중국공산혁명의 전초기지 역할을 했던 혁명의 아지트라고 봐도 틀린 말이 아니다. 호남성에서의 추수폭동이 실패한 뒤 모택동이 동료들과 함께 숨어들어갔던 산이다.

 

1934년 10월 17일 서금 소비에트 공화국의 수도였던 서금(瑞金 루이진)에서 60킬로 떨어진 우도하(雩都河)를 홍군 5개군단 8만 6천여명이 건너는 것으로 대탈주가 시작되었다. 그게 장정의 시작이었다. 

 

지도에서는 그 위치를 A로 표시해두었다. 추격을 하는 쪽은 장개석의 국민당군대와 전국에 흩어진 군벌들이다. 재벌이라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다 아는 말일 것이다. 군사력을 바탕으로 일정 지역을 통치하면서 세력을 휘두르는 자를 군벌이라고 부른다.

 

위 지도를 클릭해보면 아주 크게 확대되어 뜨게 될 것이다. 장정의 최종 종착지는 연안이었다. 수많은 군벌들과 장개석의 군대가 형성했던 포위망을 뚫기 위해 전투를 해가며 벌판을 지나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넜다. 

 

 

위에 있는 인물이 모택동이고 아래 왼쪽은 주은래, 오른쪽은 주덕이다. 공산혁명 최후의 승리자는 모택동이었지만 홍군을 창설하고 처음 지휘를 맡았던 사람은 누가 뭐라고해도 주덕으로 봐야한다.

 

장정의 원인은 공산당에 대한 국민당군의 포위섬멸작전때문이다. 장정이 시작되기 이전부터 장개석은 군사력을 동원하여 다섯차례나 공산당 토벌작전에 나섰다. 공산당 세력을 없애버리기 위한 토공(討共)작전을 견디다 못한 공산혁명세력은 근거지를 오늘날의 섬서성 연안쪽으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탈출작전을 감행한 것이다.

 

 

정강산을 근거지로 삼았던 공산혁명세력은 장개석 정부가 수도로 삼은 남경(南京 난징)으로부터 너무 가까이에 위치했다는 것이 단점이었다면 단점이었고 약점이라면 약점이었다. 사진속의 인물들은 장정출발시의 핵심인물들이다. 제일 왼쪽에 보이는 인물이 박고(博古 보구)다. 

 

박고! 원래 이름은 진방헌(秦邦憲, 秦邦宪)이다. 1907년생으로 강소성 무석출신으로 알려져 있는데 1946년에 항공기 추락사고로 사망했다. 그는 1926년 공산당의 후원으로 소련유학에 나서서 모스크바의 손중산대학에서 공산주의 이론을 공부하고 중국에 돌아온 젊은 지도자였다. 해외유학파 엘리트답게 장정 초기에 오토 브라운과 함께 중국공산당을 지도했던 핵심 멤버였다. 

 

 

오토 브라운은 독일인이었다. 나중에 그는 소련에 가서 살았다. 그렇다면 독일계 러시아인이라고 해야될 것이다. 중국식 이름이 이덕(李德 리더)다. 이덕이나 박고 같은 인물들은 주덕이 키워낸 홍군으로 하여금 장개석의 국민당 군대에 대해 정면충돌 할 것을 주장했다. 이게 홍군 실패의 원인이 되었다. 

 

그들은 러시아 공산혁명의 방식을 중국에 그대로 접목하려고 했었다. 사회구조와 역사와 인민들의 의식구조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원론에 충실하게 강한자에게 정면으로 부딪혀갔던 것이다. 하지만 모택동의 생각은 달랐다. 

 

 

모택동은 중국의 현실과 환경을 고려하여 노동자중심의 공산혁명보다는 농민중심의 공산혁명방식을 택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전면전보다는 유격전을 주장했다. 하지만 모택동의 주장이 먹혀들지 않았다.

 

 

장정 멤버로 우리 귀에 익숙한 인물로는 등소평도 있다. 등소평도 주은래와 같이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엘리트였다. 밑에서 언급할 준의회의에서 기록을 담당했던 사람이 홍성(紅星)이라는 이름을 지닌 선전신문의 편집을 맡았던 등소평이다.  

 

 

장개석의 포위작전으로 인해 궁지에 몰린 홍군은 강서성을 탈출하여 호남성 남부로 접어들었지만 상강 전투에서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만다. 장개석군대의 포위를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홍군은 귀주성 북부 통도를 거쳐 준의로 북상한 뒤 곧바로 중경으로 진출하고자 했다.

 

 

이 사진이 1930년대의 준의 모습이다. 나는 지금 준의에 와 있는 것이다. 준의에서 공산당 지도부는 그간의 과오를 분석하는 2박3일간의 정치국 회의를 가졌는데 핵심간부 20여명이 참석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념관 안에는 준의회의장소를 재연해놓았다.

 

 

준의회의의 참석자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두었다. 윗줄 제일 왼쪽이 모택동이다. 이 회의에서 그동안 찬밥 신세를 면치 못했던 모택동은 주은래의 도움으로 기사회생하게 되고 당의 전권을 쥐게 된다. 

 

실권을 거머쥔 모택동은 국민당 군대에 대한 전면전 방식을 버리고 농민의 지원을 바탕으로 한 유격전으로 전환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길래 준의회의는 중국공산혁명사에서 결코 버릴 수 없는 성지가 되었던 것이다. 

 

 

형편없는 무기와 병력의 절대적인 부족에도 불구하고 준의회의 이후부터 홍군은 눈부신 성과를 거두기 시작했다.  

 

 

모택동은 엄청난 독서량을 자랑했던 인물이다. 중국사에 관한 도서를 폭넓게 섭렵했던 모택동은 인심을 얻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게 국민당과 공산당의 운명을 갈랐다. 

 

 

요즘 우리나라 일부 정치인들은 인심을 얻는 방법에는 너무 무지하면서도 반대로 민심을 잃는 방법에는 통달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대처방안과 해결책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엄청난 공부와 통찰력이 필요할 터인데....

 

 

 

 

 

 

어리

 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