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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여행기/16 중국-대륙의 오지:중경,귀주,광서(完)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서 3

by 깜쌤 2016. 2. 17.

 

1,2호관을 보고난 뒤 3호관으로 갔다.

 

 

외빈접대실이다. 모두 깔끔하게 복원을 해두어서 허무하지는 않았다.

 

 

건물 속이 주로 사무실이어서 그런지 방마다 내용물은 엇비슷했다.

 

 

그래도 정부다운 조직을 갖추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망명정부이니만큼 세간살이 하나하나가 모두 돈이었을 것이다.

 

 

언덕에 지은 건물이니 마당은 크지 않았다.

 

 

마당이라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공간이었다고 말하는게 옳은 표현이리라.

 

 

관리동으로 쓰는 건물에서는 관리인들의 점심을 준비하고 있었다.

 

 

4호관과 5호관에서 입구쪽을 본 모습이다.

 

 

백범선생이 업무를 보셨던 주석실이다.

 

 

책상 뒤쪽에 간결한 모습의 침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국무위원실도 있었던가보다.

 

 

지금 보는 저 작은 공간이 정원이나 마당구실을 했을 것이다.  

 

 

이 정도의 공간을 마련해준 국민당 정부에게도 고마움을 느껴야하지만 역사의 흐름은 그들에게 냉정했다. 그들은 공산당과의 투쟁에서 패배하고 중경을 떠나 타이완으로 옮겨가야했다.

 

 

국민당의 패배원인중 가장 큰 것은 무능과 부패, 그리고 민심이반이었을 것이다.

 

 

공산당이 줄기차게 항일투쟁과 사회개혁을 외칠때 국민당은 부패한 매판자본과 손을 잡고 그들 편을 들어 공산당 박멸정책만 밀어붙인 것이 결정적인 패착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우리나라의 경제력이 이 정도라도 성장했기에 중국 정부에서 이런 식으로라도 복원을 해주었으리라.

 

 

잘모르긴 하지만 우리 정부에서도 복원비용을 대지 않았을까? 어떤 보도자료에 의하면 LG하우시스에서도 복원 자금을 지원했다고 하던데.....

 

 

나는 1호관의 2층 전시실로 다시 올라갔다. 맞은편의 기념품 판매소 입구가 보인다.

 

 

영토와 국민, 주권을 빼앗긴 상황에서의 독립운동은 소규모이긴 해도 군사작전과 외교활동에 역량을 집중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애국 선열들은 언젠가는 군대를 이끌고 조국으로 진입하여 작전을 펼치겠다는 일념으로 국내정진대까지 편성을 했다.

 

 

이를 위해 유격훈련도 했었다.

 

 

사진 속의 지사들은 다 어떻게 되었을까?

 

 

늠름한 자세로 우뚝 버티고 선 이분은 누구였을까?

 

 

나는 이런 사진을 볼때마다 고려대학교 총장을 지내셨던 고 김준엽박사를 떠올린다. 그분은 1945년 1월 31일 임시정부 청사입구에서 백범 김구선생을 만났다고 한다. 일본군대에서 탈주하여 광복군에 입대하겠다는 일념으로 만주에서부터 6천리나 되는 길을 돌파해서 찾아가셨던 어른이다. 

 

 

아! 여기였구나. 그 유명한 황포군관학교의 모습이 이랬었구나.

 

 

삼성에서 기증한 영상재생시설이 보였다.

 

 

나는 1호관 2층에서 입구쪽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섰다. 이 정도만 해도 이번 2016년 겨울 배낭여행은 이미 목표달성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냥 떠나오기가 너무 섭섭해서 진열관 2층 복도를 다시 한번 되돌아보았다.

 

 

임시정부청사 전체를 다시 한번 더 뇌리에 심어놓았다.

 

 

그리고는 입구를 통해 골목으로 나왔다.

 

 

태극기가 게양되어 있었더라면 애국가라도 한번 부르고 떠나왔으리라.

 

 

나는 중산1로 큰길쪽으로 나가보기로 했다. 앞에 보이는 주차장 맞은편이 임시정부청사라고 보면 된다. 

 

 

주차장 입구에서 본 임시정부구지 진열관 입구쪽의 모습이다.

 

 

이 정도의 풍경만 기억해두면 누구라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골목끝까지 걸어갔더니 비로소 안내판이 나타났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쪽, 그러니까 중산1로에서부터 찾아가는 것이 훨씬 더 찾기 쉽겠다.

 

 

우리는 그 사실을 모르고 해방비쪽에서부터 찾아갔으니 결국 뒤쪽에서 접근한 셈이 되어 찾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중산1로는 4차선 도로다.

 

 

임시정부청사로 들어가는 근처에서 점심을 먹고 가기로 했다. 선열들의 노고를 기억하고 위로해드린다는데 의미를 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깔끔하게 보이는 작은 가게에 찾아들어갔다. 바로 큰길가에 있는 집이다.

 

 

밥은 16원에서 18원 사이였다. 

 

 

나는 곱창(?)백반을 주문했다. 메뉴판 오른쪽 밑에서부터 4번째가 바로 이 음식을 의미한다. 음식이 깔끔하고 맛있었다.

 

 

우리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아챈 주인이 특별히 반찬을 더 가져다 주었다.

 

 

덕분에 한톨도 남김없이 다 긁어먹었다.

 

 

돌아올땐 처음에 사용했던 골목길로 들어가서 한번 더 걸어가기로 했다.

 

 

등에 맨 바구니에 꽃을 담아서 파는 꽃이 무엇인지 알아내질 못했다. 저 꽃을 파는 사람이 굉장히 많았기에 궁금증이 가득했지만 아직도 해결하지 못했다.

 

 

해방비를 향하여 걷는 발걸음이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었다.

 

 

 

 

 

 

어리

버리